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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연수기 파일

아하 2013. 1. 2. 12:31

 

백승우-쿠바연수기.hwp

한 번에 왕창 다 보고 싶은 분을 위해 올립니다.

쿠바 유기농업 연수 보고서

 

백승우(화천 농부)

 

문제는 경제다”....쿠바 국제친선협회(ICAF) 부회장

약값은 시장이 결정 한다”....쿠바유전생명공학센터(CIGB) 판매책임자

경제는 확실히 점점 나아지고 있다”....트리니다드 민박집 주인의 남편 료말

제기랄, 잘 사나 못 사나 어딜 가도 그저 돈 타령이다”...화천농부 백아무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름, 쿠바

. . 라고 하는 이 두 음절은 괜히 마음 속에 낭만적이고 몽롱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혁명의 나라, 체게바라의 나라, 사탕수수와 럼과 시가와 재즈살사의 나라,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리는 나라 등등. 온갖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게다가 최근에는 여기에 덧붙여 유기농업과 도시농업의 나라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니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기회만 되면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마치 낙원인 양 묘사되는 찬사의 말들이 넘쳐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독재와 빈곤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악담이 유통되는 이 문제의 나라를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선플과 악플이 난무하는 유명 연예인의 분칠을 걷어낸 쌩얼을 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특히 내 마음을 잡아 끈 것은 혁명일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대한민국 2012년의 현실은, 물질적으로 대단한 풍요를 누리고 있고 기본적인 인권의 보장과 함께 상당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부분 피로감을 호소한다. 정신없이 팽팽 돌아가는 사회가 사람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한다. 행복은 요원해 보인다. 민족은 여전히 두개로 쪼개진 채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고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업주가 고용한 깡패들이 짓쳐들어와 폭력을 행사하고 노동조합을 와해시킨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목숨을 건 농성을 한다. 자살율 최고 출산율 최저로 압축되는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비루하고 참담하다.

우리에겐 정말 뭔가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에서 419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 19591월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엎는 혁명을 한 이래,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쿠바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들려오는 소문은 무성한데, 실제로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일까?

쿠바 유기농업 연수

20121012, 대산농촌문화재단으로부터 쿠바유기농업연수 참가 확정 통보를 받았다. 게다가 1012일은 내 양력 생일이다. 억수로 기뻤다. 9월 말 추석 연휴 직전에 연수 참가 신청서를 냈다. 기다리는 내내 쿠바 갈 생각에 신이 나서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일이 힘 드는 줄도 몰랐다. 1011일에 연수 참가에 대한 가부를 통보해주겠다고 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풀이 팍 죽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연락이 왔다. 하루 만의 반전이었다. 아싸, 쿠바! 좋은 생일 선물이었다.

대산농촌문화재단은 교보생명 창립자인 대산 신용호(1917~2003)선생이 1981년 설립한 농업농촌 지원 공익재단이다. “농업이 미래다. 농촌이 희망이다를 으뜸구호로 하는 이 단체의 존재는, 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물질만능 대한민국에서 참으로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대산농촌문화재단의 창립이념은 네 가지로 되어 있다. 첨단농업기술진흥농업구조개선복지농촌건설인류복지증진 등이다. 언뜻 보면 네 가지 이념은 서로 상충되는 걸로 보인다.

우선 첨단농업기술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한 편으로 첨단 과학기술인 유전자조작을 가한 첨단 종자를 뿌리고 컴퓨터로 조작하는 최첨단 대규모 정밀기계로 땅을 갈고 수확하여 가공하며, 최첨단 화학농자재라 할 수 있는 선택성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살포해서 짓는 대규모 단작농업을 첨단농업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원의 순환생물다양성 증진생태계 유지를 목표로, 사라져가는 토종종자를 복원하고 옛날 농가들처럼 집집마다 너무 많지 않은 가축을 길러 농가부산물을 활용하고 기계와 외부자원의 투입을 최소화하며 자급자족을 우선으로 하는 소량다품종 농사를 유기적인 방식으로 짓는 농법 역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한 최첨단농업이라 할 수 있다.

농업구조개선과 관련해서도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시장 중심 경쟁력 지상주의다.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업총생산의 비중은 2%남짓에 불과한데 농민의 수는 6%가 넘으며, 농업에 들어가는 정부예산역시 6%가 넘는 작금의 현실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으며 따라서 총생산의 비율과 농업인구의 비율이 비슷해질 때까지 농업인구를 계속해서 쉬지 않고 줄여나가는데 박차를 가해야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 산업 사회가 몰고 온 인류의 심각한 위기 상황, 즉 인간성 상실공동체 붕괴자연환경 파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농촌공동체를 복원하고 농업을 기초로 한 새로운 문명, 대안문명을 창조하는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그러기 위해서는 농촌의 토대를 더욱 굳건히 해야 하고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사꾼은 더욱 늘어나야 하며 나아가 국민 전체가 단 한 평이라도 농사를 짓는 국민농업시대, 생활농업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거대기업을 이끌어가는 기업가로서 농촌문화재단을 만들 정도로 굉장한 통찰과 혜안을 갖고 계셨을 것으로 보이는 대산 선생이 만약 지금 살아계셨다면 어느 길로 향하셨을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나를 쿠바로 불러들인 건 혁명도 살사도 아니고 농업, 그것도 유기농업이었다. 나는 혁명가도 여행가도 땐서도 음아가도 아니고 농사꾼이었던 것이다. 농사꾼 만세다! 스무 명이 가는 대산농촌문화재단 해외농업연수단의 일원이 되어 쿠바에 가게 되었다. 혹시나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못 가게 되지 않았나 싶어서 조금 마음이 쓰이기도 했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담당 과장님이 얘기해 주셔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유난히 뜨겁고 가물었던 2012년 여름 상반기, 애호박풋고추오이가지토마토 등 과채류 농사는 대풍이었다. 공급과잉과 소비침체로 출하를 거의 못 하다시피하며 시간을 다 까먹었다. 8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태풍이 몰아치고 비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수확할 게 없어서 또 시간을 다 까먹었다. 이렇게저렇게 출하를 못 하거나 수확을 못 하거나 하면서 시간만 다 까먹고 농사를 거의 망치다시피하면서 한 해를 보내고 말아 꿀꿀하고 우울하던 2012년이 쿠바 농업연수가 결정되면서 갑자기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농사 뒷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고 일찌감치 김장을 했다. 짬을 내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자료를 뒤적였다.

 

원래 쿠바에는 누가 살았을까?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인(원래의 주인이란 의미로 원주인이라 쓰기로 한다)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쿠바에 들떠 있는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물었다.

거의 다 죽은 거 아냐?”라고 대답했다.

전쟁보다는 스페인 사람들이 몸에 붙여 들여온 병균에 감염돼서 죽은 거 아닌가?”라고 내가 덧붙였다.

아닐 걸…….”이라며 아내는 입맛을 다셨다.

고백컨대 연수를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기 전까지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아즈텍이니 잉카니 마야니 하는 말들이 어쩐지 문명 이전 혹은 고대문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막연하고 희미하게 잘 못 인지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인들의 멸종 역시, 동물도 아니고 인간 종이, 거의 멸종에 가까운 상태에 이를 수 있는 다른 이유가 병 말고 달리 또 있겠나 하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메리카 모든 나라의 역사는 14921012일을 출발점으로 한다(1012일은 자꾸 나온다). 콜롬버스가 쿠바 옆에 늘어서 있는 바하마군도(에 있는 조그만 섬)에 도착한 날이다. 1492년은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던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 사람들 관점에서 보자면 잃어버렸던 땅을 모두 되찾은 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이때 무슨 짓을 하고 있었을까? 이성계가 군사쿠데타에 성공해서 기존 권력자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새로운 군사정부를 구성한 해가 1392년이다. 일본이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해온 임진년은 1592년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대륙 옆구리 조그만 섬에 상륙한 해는 그러니까 조선시대(1392~1910)를 둘로 잘라 상하반기로 나눴을 때, 상반기의 딱 한가운데다. 당시의 조선 임금은 성종(재위 1469~1494)으로 말년에 해당한다. 군사력을 앞세워 정권을 차지한 이성계와 이방원, 이유(세조. 재위 1455~1468) 등의 시대가 끝나고 조선은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군사쿠데타에서 공을 세우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대충 늙어 사라지고 사림파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엘리트들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던 왕의 부름을 받고 속속 상경하여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하는 권력 교체기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몰려와 쿠바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분탕질하며 약탈하고 살해하는 16세기, 조선 권력층은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고 빼앗는 권력투쟁에 본격적으로 몰입한다. 조선의 정치엘리트들은 조정에 나란히 서서 근엄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나라 살림을 의논하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붙잡아다가 고문하고 살해하고, 그 사람의 재산과 아내와 자녀를 서로 빼앗아 나누어 가지고 성노리개로 삼거나 노비로 부리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짓거리들을 정치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의 16세기는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로 이어지는 사화의 시대였다. 정치가 개판이면 당연히 도적이 날뛰게 되는데 의적 임꺽정(?~1562)이 힘과 의로움을 뽐낸 때도 이 때다.

대학교수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역사학자로서 노암촘스키와 함께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일컬어진다는 미국사람 하워드 진은 미국민중사를 쓰면서 앞머리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둔감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역사를 대하는 나의 접근법이다.”(하워드진 지음 유강은 옮김, 미국민중사1, 시울, 2006. 33)라고 썼다. “과거를 향해 던져진 눈물과 분노는 현재를 위한 우리의 도덕적 에너지를 고갈시켜버린다.”(앞의 책, 32)라고도 썼다.

인간 종을 멸종시켜버릴 정도의 끔찍하고 잔혹한 행위가 낱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16세기 쿠바 자료를 검토하는 일 역시 할 수 있는 한 가장 둔감해지는태도를 필요로 했다. 누군가를 야만인이라 불러야 한다면 콜롬버스를 포함해서 아메리카로 몰려온 유럽인들을 제일 먼저 야만인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전봉준(1854~1895)과 호세마르티(1853~1895)

쿠바의 모든 국공립기관에는 호세마르티상이 서 있다. 툭 튀어나온 역삼각 대머리에 카이저수염을 단 채로 두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고 있다. 호세마르티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이며 사상가이고 직접 조직을 꾸리고 전장에서 말을 타고 총을 쏘며 무장투쟁에 나섰던 독립투사였다. 호세마르티가 염원했던 쿠바의 독립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이다. 호세마르티의 독립운동을 비유해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단순히 비유를 위한 것이니까 기분 나빠도 참아주시기 바란다. 예컨대, 1592년 조선을 침공한 일본(임진왜란)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어쩌다보니 모조리 죽여버리게 되었다. 칼이 잘 드나 안 드나 시험 삼아 베어 보느라고도 죽이고 대드는 녀석들 본보기 삼아서도 죽이고 광산에서 정해진 만큼 금 캐는 양을 못 채운 녀석도 죽이고, 남자를 다 끌어다가 광산에서 일 부려먹어야 하니까 여자들을 동원해 농사를 짓는데 먹을 걸 조금 주고 일만 시키다보니 과로로도 죽고 절망해서 자살도 하고 애도 낳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도 영양실조로 죽고 산 아이도 어미가 죽이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조선 땅에 조선 종자는 고만 씨가 마르고 말았다. 일 부려먹을 사람이 씨가 말랐으니 할 수 없이 멀리 유럽에서 흰둥이들을 잡아다가 부려먹게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인구도 늘어나고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들도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4백여 년이 흐른 1992년쯤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자들(일본계, 일본+흰둥계, 일본+조선계, 흰둥계 등)이 조선 땅에서 나는 대부분의 재부를 빼앗아가며 정치사회적 불평등을 강요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며 폭압을 휘두르는 일본 본토를 향해 독립투쟁에 나선다. 이 싸움은 결정적으로 일부 일본계 지식인층이 해방을 염원하며 끊임없이 저항해온 흰둥계들의 편에 서면서 식민지조선대 일본이라는 전면전의 양태를 띄게 되었다.

조선을 쿠바로, 일본은 스페인으로, 흰둥계를 흑인으로 바꾸면 딱 맞다. 때는 1892년이다. 네 종류 인간들의 평등과 정치경제 활동의 자유를 내세운 이 같은 독립 혹은 혁명운동은 당연히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적(인종차별과 남녀차별의 철폐) 성격을 띈다. 독립운동의 선두에 선 자가 말하자면 호세마르티다. 마르티는 체게바라(1928~1967)와 피델 카스트로(1926~)의 영웅이자 195611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조국의 혁명을 위해 그란마호에 올랐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여든 두 명 몽상가들 모두의 영웅이었을 것이다.

호세마르티를 검색해서 생몰연대를 확인하고 첫 번째로 떠오른 사람이 전봉준이었다. 호세마르티의 생몰연대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몰연대와 거의 정확하게 겹친다. 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세계 열강이 조선에서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정치 군사적으로 각축하는 중앙정부는 혼란에 빠져 지역 장악력이 미약해지고 이런 권력 공백상태를 이용해 지방 관리들의 수탈과 폭압이 더해져 가는 가운데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침탈에 반대하고 봉건적 사회질서의 개혁(신분제 철폐와 남녀평등으로 상징되는)을 요구하며 떨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한 가운데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 있었다.

전봉준과 호세마르티, 이들 두 사람은 같은 시간대에 제각각 다른 공간에서 같은 목표, 즉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민중들과 함께 목숨을 건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다.

운 좋게도 호세마르티의 후예들은 지지부진한 전봉준의 후예들과는 달리 1959년 벽두에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제국주의자들을 쫓아냈으며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인민 모두가 평등하게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혁명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알라마르 농장 : 쿠바 vs. 북한

알라마르 농장은 아바나시() 아바나 델 에스데 구() 알라마르동()에 있다. '마르'는 바닷가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이나 혹은 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영일만, 마포, 서귀포, 성산포 같은. 지도에 보면 아바나만()에서 오른쪽으로 해안을 따라 가다가 첫 번째 나오는 만()에 있다.

#1.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 배가 고픈데 왜 채소인가? 곡식이 아니고?”

내가 조합장 미겔씨에게 물었다. 미겔은 뜸도 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대답이었다. 내가 뭘 궁금해 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쿠바는 춥지 않다. 유까, 말랑가, 고구마, 토마토, , 옥수수, 구아바, 사탕수수 등등 열대작물이 다 있다. 과일도 끊이지 않고 난다. 우리는 사탕수수즙 마시고 고기기름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 많은 게 필요한 게 아니다.”

#2.

쿠바에 온지 만 1년 정도 되었다는 쿠바주재 코트라관장 000씨는 말했다.

먹을거리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특히 채소. 한번은 채소가 너무 먹고 싶어서 (손으로 그릇에서 채소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시늉을 반복하며) 썩은 것도 그냥 막 집어 먹었어요. 그리고 배탈 나고.”

먹을 게 아주 없는 게 아니라고 덧붙였다. 단지 충분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온갖 게 다 풍족한 우리식의 식습관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3.

쿠바는 뚜렷한 계절구분이 없다. 연중 따땃하다. 우리가 쿠바에 머물렀던 1120~125일은 쿠바에서는 제일 선선한 때라는데 내가 사는 강원도 화천 510일 경, 종상(終霜)일이 지난 때와 비슷했다. 새벽 너 댓 시쯤에 집에서 나갈 때는 추워서 내복에 두꺼운 솜바지까지 껴입고 나갔다가 9시쯤 되면 더워서 내복을 벗고 솜바지 입고 일하다가 곧 해가 쨍하고 뜨거워지면 솜바지는 얇은 일바지로 갈아입고 윗도리는 속옷만 입고 일하다가 오후 다섯 시쯤 돼서 해가 기울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서늘해지면 벗어뒀던 옷을 차근차근 다시 입어야 하는 날씨다. 비슷하기는 하지만 내복에 두꺼운 솜바지를 입어야 할 정도로 아바나의 새벽 기온이 내려가지는 않았다. 그저 얇은 셔츠가 조금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서 재미 삼아 돌발 퀴즈. 쿠바에서 제일 추운 데는 어디일까요? 정답은 이 글 어딘가에 숨겨 놓겠어요. 호호홋!]

쿠바는 산이 전체국토의 20%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게다가 섬이다. 이렇게 되면 물이 부족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잡아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야가 넓어 물빠짐도 나쁘다. 물이 풍족하지 않으면 농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연중 고르게 비가 내려준다면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겠으나 불행히도 쿠바는 우기와 건기로 구분돼서 우기인 5~10월에만 월평균 100~200정도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나머지 반 동안에는 비가 거의 없다. 우기 동안에는 얘길 들어보면 거의 매일 저녁 한 시간 정도 세상이 다 물에 잠길 것 같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뚝 그친다고 한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이 천천히 빠져나가고 다음 날도 반복된다. 평지에 물이 왕창 쏟아지니 쉽게 빠지지도 않을 것이고, 기온은 높다. 이런 조건에서 잎줄기채소는 견딜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먹는 쌈채류(각종 상추배추양상추케일브로콜리 등등)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고 질소질이 풍부한 거름진 토양과 충분한 물을 필요로 한다. 쿠바는 잎줄기채소를 재배하기에 적당한 조건이 아니다. 더구나 고온다습한 조건에서 이동과 보관에도 상당한 에너지를 써야 한다. 우리가 둘러본 올가노포니코에서는 예외 없이 거의 쌈채류 중심의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이는 쿠바에서는 상당히 이국적인 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4.

미겔에게 던진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니네 나라 서북쪽 구릉지대인 비냘레스에 가 보니까 소농(小農)들이 있더라. 밭도 있고 논도 있는데 밭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밭은 쪼가리쪼가리로 나누어서 각각 여러 작물(담배, 사탕수수, 토마토, 콩과 옥수수, 토란, 유까 등)을 고루 심고, 밭을 살펴보니 수확기에 접어든 콩과 옥수수가 있는 밭도 있고 이제 막 모를 옮겨 심은 밭이 함께 있었다. 농사꾼들은 겨리소(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질. 한 마리는 호리소라 한다)로 쟁기질하고 흙을 잘게 부수고 골을 내더라. 묵정밭과 마당에는 닭이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고 돼지가 이구석 저구석에서 꿀꿀거린다. 목에 줄을 매어 마치 우리가 염소를 키우듯이 이리저리 몰고 가 묶어두기도 한다. 너른 초지에는 몇 마리 안 되는 말과 소가 풀을 뜯고 있고, 물어보니 이렇게 서너 해 초지로 쓰고 땅심이 회복되면 다시 갈고 작물을 키운다고 했다. 농사꾼들은 마차나 소달구지를 몰기도 하고 말을 타고 따가닥거리며 밭과 거리를 활보한다. 윤작간작혼작이며 유축복합농업이며 자급자족이라는 유기농업의 가치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전통적인 소농들이 띄엄띄엄 농장 한 귀퉁이에 집을 짓고 가축들과 함께 살고 있더라.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이미 다 사라진 풍경들인데, 너희 나라에는 아직도 이런 농가가 있어서 놀랐다. 이런 소농이 생겨난 때가 언제인지 말해 줄 수 있겠니? 90년대 경제 위기로 인해 생겨난 풍경인지, 아니면 역사가 훨씬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렇게 장황하고 복잡한 질문을 스페인어 배운지 1년밖에 안 된 젊은 친구가 요령 좋게 옮겨 전달했을 리도 없고, 미겔 역시 질문의 정확한 취지를 파악했을 리도 없다. 미겔은 예의 소련 붕괴와 동구권 몰락, 석유화학비료제초제 등의 수입 중단 얘기를 되풀이하려 했을 뿐이다. 비냘레스에서 말만 통했으면 다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높은 언어장벽에 꽉 막혀서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방법이 알라마르를 다시 방문해서 농업전문가인 미겔에게 물어 보는 것이었는데, 실패다. 왕실패!

진짜 궁금한 건 이런 거였다.

쿠바의 소농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형성됐고, 어느 지역에 얼마나 분포하는가?”

이른바 평화기의 특별시기에 소농들도 함께 굶주렸는가? 아니면 비교적 쉽게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이겨냈는가?”

쿠바의 유기농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억지춘향으로 보이는 오가노포니코 같은 걸 만드는 것보다 이미 있는 소농모델을 확산시키는 것이 더 유력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질문은 있는데 던질 방법도 없고 답도 돌아오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서, 그렇다면 아바나시 외곽지역을 둘러보며 소농의 존재를 찾아보기로 했다. 찾아간 곳은 아바나도() 서쪽으로 바로 인접해 있는 아르떼미사도() 바우타군() 가이미토면()이었다. 아바나 시내 중심지에서 승용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이미토면은 내가 살고 있는 간동면 중심지와 비슷한 규모로 보였는데 마을 안길은 반듯하게 정비돼 있고 가옥이 밀집해 있었다. 안내해준 친구의 말에 따르면 거주지만 농촌일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로 일을 나간다고 했다. 인구의 80퍼센트 정도가 도시에 거주하고 20퍼센트 정도가 농촌에 거주하지만, 농촌 거주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일터를 갖고 있을 거라고 했다. 이 친구 말에 따르면 농업인구는 그러니까 전체 인구의 4퍼센트에도 미치지 않는 셈이다.

전직 교사였고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바나 시내로 일주일에 두 번 일을 나가는 올가(58년생)라는 아주머니와 인터뷰했다. 나는 질문 방식을 바꿨다.

어릴 때 이 동네 사셨어요?”

아니,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간 깡촌에 살았어요.”

아버지는 뭐 하셨어요?”

우리 아빠는 농부였어요.”

아싸!

파파 연세는요?”

지금 84.”

84세면 28년생이다. 확인해 보니 맞다. 체게바라와 동갑이다. 돌아가신 울 아부지보다 두 해 먼저 태어나셨다.

, 뭐 심으셨어요?”

, 옥수수, 토란, 유까, 사탕수수, 담배 등등등 이거저거 골고루 많이 심었어요.”

농지 면적은 얼마나 됐어요?”

“(우리가 얘기를 나눈 다세대 연립주택 앞 길 건너편에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 정도 돼 보이는 넓은 운동장이 있었는데 이를 가리키며) 저보다 넓었다우.”

땅은 어떻게 갈았어요? 소로 갈았어요?”

거럼. 소로 갈았지.”

이 대목에서 일행이었던 박선생이 규모가 큰 넓은 밭은 기계가 갈지 않았느냐고 확인했다. 올가 아주머니는 그렇다고 했다. 넓은 밭은 기계가 와서 갈아주고 갔다고 했다. 소득을 위한 혹은 정부 납품을 위한 주작목이 있고, 다른 여러 부작목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집은 여기처럼 밀집해 있었나요? 아니면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나요?”

여기 한 채, 저만큼 멀리멀리 가서 한 채 이런 식이었어요. 그렇지만 바쁜 때는 주변 사람들이 다 모여서 함께 일을 했고, 나도 어렸지만 거들었다우.”

올가 아주머니는 콩씨 넣는 몸짓을 했다.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들어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 골 탄 밭고랑에 콩씨를 들고 들어가서 꼿꼿이 선 채로 발 앞에 콩씨를 던지고 왼 발로 한 번 흙을 덮어주고 오른발로 한 번 흙을 덮어주는 식으로 전진하면서 콩을 심는 것이다. 저 몸짓은 우리 장모님(43년생)이 자기 어릴 때 어른들 도와서 콩 심을 때 자기도 거들며 아주 잘 심었다고 자랑하실 때의 몸짓과 완전히 일치한다.

심은 것들은 수확해서 집에서 다 먹었어요? 아니면 내다 팔았어요?”

먹기도 하고 팔기도 했지요.”

집에 가축도 많았겠어요?”

당근이쥐. , 돼지, , , 개가 우글우글

빙고!

올가 아주머니가 기억하는 어린시절 모습은 내가 비냘레스에서 본 풍경과 완전히 일치했다.

혁명의 고향 남부. 씨에라마에스트라지역의 농사꾼들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최근에 들이닥친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처참하게 파괴되어서 외부인의 접근이 차단되었다고 하는 동남부지역 산간지대 농사꾼들의 모습을 보지 못 한 채 돌아가야 하는 처지가 안타까웠다. 한 줌도 안 되는 산 속 무장 게릴라들의 절대적 우군이었던 동남부지역 농사꾼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고 지금은 또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는지?

중부지방은 대평야였다. 산타클라라와 트리니다드는 긴 쿠바 섬의 중심부에 있는데, 아바나에서 중부지방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창밖으로 보이는 건 광활한 평야였다. 끝없이 펼쳐진 벌판은 대부분 초지였고, 간혹 나타나는 밭은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사탕수수 물결이었다. 딱 한 번 나타난 과수원역시 백만평 단위로 헤아려야 하는 넓이였다.

쿠바 식당 상차림

제발 메뉴를 좀 보고 주문해서 먹어 보면 원이 없겠다.”

우리 연수단원 중 한 분은 이렇게 푸념했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잡고 앉으면 서빙하는 직원이 와서 묻는다.

, 콜라, 주스, 맥주, 우유(분유다. 생우유는 냉장유통해야 하는데 쿠바는 아직 냉장유통 체계가 안 돼 있다.) 중에 뭐 마실래?”

물을 그냥 주고 추가로 뭘 마실지 묻는 게 아니도. 물도 선택지 중 하나다. 나중에 보니까 코스 요리가 아니고 단품 식사일 때는 얘들도 다 계산해야 한다. 1~1.5(쿡은 쿠바에서 쓰는 외국인 전용 태환화폐로 달러와 등가다).

다음은 뭘 먹을지 골라야 하는데, 어디나 똑같다. 이런 식이다.

닭 먹을래? 돼지 먹을래? 생선 먹을래? 버거 먹을래?”

이게 다다. 우리는 닭고기만 가지고도 볶아먹고 지져먹고 튀겨먹고 삶아먹고 구워먹고 찜쪄먹고 잘게잘게 뜯어서 무쳐먹는다. 하여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해 먹는데 이 나라는 참 단순하다. 요리법이 하나뿐인 것 같다. 굽는건지 튀기는건지 볶는건지 닭을 토막쳐서 겉에 기름기가 도는 채로 덩어리째 내는 것밖에 없다. 돼지나 생선도 마찬가지다.

큰 접시에 폴폴 날아갈 것 같은 밥알갱이가 버글거리는 밥 한 공기 정도, 잘게 썬 채소, 보통 오이 몇 조각에 채 썬 당근과 양배추 조금 정도, 닭이나 돼지나 생선 토막 한 두 덩어리. 이게 다다. 특별히 요리라고 할 게 없어 보인다. 밥 다 먹고 나면 커피나 홍차 혹은 아이스크림을 갖다 준다. 물론 요것도 코스요리로 먹지 않는 이상 다 따로 계산 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이런 식사를 하는 1,100만 인구를 쿠바 농민들이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일까? 축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해 있어야 하는데, 돼지나 닭은 농가에 조금 있는 것 말고는 보지 못 했다. 우리나라에 널려 있는 밀집 사육 시설은 단 하나도 못 봤다. 급식소로 보이는 건물들이 제법 많이 보였는데 거기에는 주로 빵과 흰달걀이 무더기로 쌓를 여 있었다. 더운 나라라서 밀은 생산이 안 된다. 전량 수입일 것이다. 달걀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일본처럼 생선은 그럼 풍부할까? 그것도 아니다. 수산업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수준이라 했다.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배 한 척을 못 봤다. 그럼 쌀은? 정말 극히 드물게 밭 구석에 처박혀 있는 논 꼬라지로 봤을 때 쌀도 자급이 될 리 없다.

어떤 이는 쿠바의 식량 자급율이 40%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식량의 80%를 수입해 온다고도 하는데 국가 공식 통계는 어떤지 모르겠다. 설령 국가 공식 통계가 있다고 해도, 이 통계에는 함정이 있다. 국민들이 넉넉하게 먹는 걸 기준으로 하는지 아니면 쫄쫄 굶거나 아니면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지 잘 보여주지 않는다. 북한의 식량 자급율이 70%를 넘는다고 하지만 이는 소비총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일 뿐, 그 소비의 질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북한 사람들 전체가 일년 동안 쌀 100톤을 먹었는데 그 중에 70톤을 자급했다고 하자. 그러면 70% 자급이다. 그런데 일년 동안 배고파 굶어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면 이 통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식량 자급율 20%대의 대한민국 통계에도 사실 위험을 강조하기 위한 뻥이 조금 배어 있다고 나는 본다. 가축을 먹이거나 식용 기름을 얻기 위해 수입하는 곡물이 많다. 가축 먹이를 제외하고 사람 먹는 것으로만 계산하면 자급율은 몇 년 전에 검토한 것이기는 한데 50%가 약간 넘는다. 그러니까 자급율을 높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고기를 적게 먹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 쓰레기를 돈으로 환산하고 여기에 음식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합한 금액을 환경부는 20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2010년 기준 농림수산업 총생산이 42조원인 걸 생각하면 기가 막힐 수치다. 깔끔하게 잘만 먹어도 식량 자급율은 급증한다. 90년대 초반 쿠바가 처한 위기 상황을 토대로 수치를 가감하며 식량수급과 관련한 시뮬레이션을 한 번 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텐데 아쉽게도 나는 능력도 시간도 안 된다. 농사를 져야 한단 말이다!

쿠바 국토의 넓이는 대한민국과 거의 같은데 버스 타고 고속도로를 휙휙 지나가면서 본 대부분의 땅은 초지였다. 드물게 논이 보였고 아주 드물게 개울이 보였다. 한강이나 낙동강 중류쯤에 해당하는 정도의 큰 강은 하나도 못 봤다. 가시철조망으로 넓게 구획된 초지에서는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땅 면적에 비해서 풀 뜯는 소는 없는 거나 다름없는 숫자였다. 그런데도 소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물어보니 쿠바에 1년 정도 살고 있는 젊은 친구 얘기로는 가끔이긴 하지만 먹기는 먹는다고 한다. 소위 암시장인데, 친구와 친구로 연결된 훌륭한 지하 경제 네트워크가 작동한다는 것.

한국과 쿠바는 국토 넓이가 거의 같으니까 비교해 보기도 참 좋다. 그래서 나는 또 궁금해졌다. 한반도 전체 인구가 1,000만을 돌파하는 시점은 언제쯤이었을까? 자료에 따르면 조선 중기에 1,000만을 넘어섰고, 조선 말 1,300만 정도로 되어 있다. 태어나기도 많이 태어났을 것이고, 흉년이 들면 굶어 죽었을 테고, 봄마다 보릿고개 넘지 못 해 죽어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식량이나 석유를 수입했을 리 없다. 외부자원의 유입 없이 당시의 씨앗과 당시의 기술력, 당시의 농업기반과 당시의 정치사회구조 속에서 이 땅이 먹여 살릴 수 있는 최대치는 1,300만 정도였다고 보면 될 듯하다. 지금 한반도에는 무려 7천만이 살고 있다.

그러니까 쿠바 정도의 국토라면 1,100만 정도의 인구는 당연히 먹여 살려야 맞는 것 아니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인데, 사실 이 비교는 온당하지 못 하다. 조선의 강역은 한반도 전역이었으므로, 반띵이 해줘야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인구 통계가 22899천명으로 되어 있다. 쿠바와 한반도의 인구밀도가 비슷해진 시점은 1930년대 중반쯤으로 보면 될 듯하다.

 

트리니다드 vs. 비냘레스

트리니다드는 구아바나처럼 옛날 집과 옛길을 그대로 둬서 완전 횡재한 동네다. 쉼없이 밀려드는 여행객들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연수단이 철수한 날 저녁 일곱 시 반쯤, 번쩍번쩍 빛나는 반팔 셔츠(츄리닝이다)며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반바지(이것도 츄리닝이다)며 신발까지 온통 나이키로 치장한 젊고 덩치 큰 흑인 인력거(사실은 자전거거)꾼이, 함께 있던 연수단이 철수하면서, 아바나 최고층 최고급 식당에서 이 동네 사람들 두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최고급 요리를 한 끼 식사로 낼름 잡숫는 호사를 누리다가 순식간에 극빈층으로 전락한 왜소하고 헐쭘하기 짝이 없는 동양계 외국인 여행객 둘을 태우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네모난 돌로 바닥을 깐 울퉁불퉁하고 경사진 어둑어둑한 오래 된 고갯길을 물어물어 민박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극빈층으로 전락한 왜소하고 헐쭘하기 짝이 없는 동양계 외국인 둘은 물론 박선생과 나다. 민박집을 소개받아 버스터미널 앞에서 떼로 몰려와 호객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인력거꾼에게 민박집 명함을 줬는데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그 민박집을 찾지 못 해 젊은 친구는 한 참을 헤맸다. 다음 날 살펴보니 버스터미널에서 민박집까지는 1km도 채 안 됐다.

트리니다드는 쿠바 중심부인 산티 스피리투스도() 남부 해안가에 있는 작은 도시다. 인구는 2004년 기준으로 73. 도시 외곽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도시는 완전 장사속이었다. 여러 날 머물면서 친구를 사귀고, 친구 자격으로 동네 얘기를 들을 수 있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저 아래 동네 남쪽 산티아고 데 쿠바를 향해 가는 중 잠시 들른, 그저 스쳐가는 나그네 입장에서 느끼는 동네 분위기는 좀 살풍경했다. 여기에 있는 내내 계속 뭔가 바가지를 쓰고 있는 듯한 찜찜함이 따라다녔다.

우리가 묵은 민박집 주인(빅토리아. 사진으로 볼 때 50은 넘어 보이는 백인계 아줌마다. 남편 료말에 따르면 사교적이고 개방적이며 친구 사귀기를 좋아한다. 아이가 아파서 인근 도시 병원에 데리고 나갔다고 했다. 직접 보지는 못 했다.)의 남편( 료말. 37. 목수다) 말에 따르면, 자기가 한 달 꼬박 일해서 받는 급료가 15쿡이라고 했다. 우리가 민박집에 하루 묵는데 지불한 돈이 20쿡이다. 저녁은 두 사람 각 5쿡씩 10쿡에 아침 식사 2인분이 6. 여기에 지난 밤 내가 마신 커피 1쿡은 별도라고 돈을 내라고 해서 실갱이하다가 결국 냈다. 두 사람이 하루 묵으면서 낸 돈의 합은 37쿡이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주고 우리한테 돈을 받은 사람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이 집 바깥 양반인 목수 료말이 아니라 빅토리아 아줌마가 부탁하고 갔음직한 이웃집 아줌마였다. 어제 저녁 먹고 얘기 나누면서 료말이 럼주병을 들고와서 서비스라며 한 잔씩 따라줘서 마셨는데, 마누라가 돌아오면 혼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난 밤에 료말과 떠듬떠듬 대화를 나눴다. 료말은 목수로서 마을 재건에 참여했다고 했다.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열라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목수 실기 수업을 받아서 목수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원래 어부였다. 조금 떨어진 동네에 살고 계시다.

일은 마음에 드니?”라고 내가 물었다.

거럼!” 료말은 단박에 대답했다. 나는 좀 의심스러웠다. 한 달 15쿡이라며.

민박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 살만 하겠지만 민박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사니?”

확실히 우리처럼 민박 치는 집들이 다른 집보다는 먹고 사는 게 낫다. 하지만 세금을 왕창 내야 해서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떼돈을 버는 건 아니다.”라며 숙박자 명단을 반드시 작성해야 한다면서 서류를 가져다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우리한테는 서류 작성하자는 소리를 아예 안 했다. 내 예민한 촉이 작동한다. 뭔가 냄새가 난다. 우리가 이 집에 묵었다는 사실은 분명 관계기관 담당자에게 포착 됐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서류를 작성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 안 그러면 벌금이 쎄다. 그런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했다. 이거는 말하자면 불법 혹은 탈법인데, 이웃사람일 것이 분명한 관계기관 담당자와 민박집 주인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매우 높은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 말 꼬인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선에서 거래가 있을 수 있다. 이거는 순전히 내 짐작이다.

료말은 경제는 확실히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도 했다.

다음날 아침, 료말의 직장은 집 바로 앞, 길 건너에 있었다. 열려진 큰 대문 안으로 직장에서 일하는 료말의 모습이 보였다. 삽은 한 자루다. 사람은 셋이다. 한 사람은 설렁설렁 삽질하고 있고 둘은 탱자탱자 놀고 있다. 엊저녁에 료말이 한 말에 대한 내 인식이 확 뒤집어졌다. 마을을 만들기 위해 열라 열심히 일했다는 말은 심각하게 의심스러워졌다. 일이 마음에 든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노동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돈의 흐름이 왜곡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하고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난장판이 된다. 트리니다드는 난장판스러워 보였다. 외국인전용 고속버스에서 내리자마자 20미터쯤 되는 광장 출구를 가득 메운 채 극성스럽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민박집 주인장들, 인력거 기사들에게 가로막혀야 했다.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냉담해 보였고, 노인들만 예외였다, 이래저래 마주친 사람들은 다들 장사속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빼내기 위해 쥐어짜이는 듯한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넓은 평야를 배경으로 한 항구도시라는 점에서 트리니다드는 일제 강점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수탈을 위한 도시 군산과 비슷한 점이 있다. 군산을 통해서 비옥한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이 새나갔듯이 트리니닷을 통해서는 사탕수수 혹은 설탕이 새나갔을 것이다. 누군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민중들은 피땀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18세기 설탕산업의 대호황기를 지나 조용하게 묻혀있던 시골 조그만 동네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는 오래된 미래에서 갑작스럽게 관광객에게 노출된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 어떻게 변하는지 자세히 보여준 바 있다. 트리니다드는 책 속의 라다크를 떠올리게 했다.

한편 쿠바 북서부 산간지역에 위치한 비냘레스는 또 완전히 딴판이었다. 비냘레스는 인구 27천의 작은 도시다. 사람들은 밝고 상냥하고 눈만 마주치면 올라!~”했다. 전체 인구수는 내가 사는 화천군과 비슷한데, 집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시가지는 화천읍에 비해 턱없이 작고, 사내면 정도밖에 안 되는 듯했다. 큰길에는 크고 작은 아주 낡은 고물차와 날렵하고 번쩍번쩍 윤이 나는 새 자동차와 마차며 소달구지며 말을 탄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잘 섞여 너무 혼잡하지도 너무 한가하지도 않게 어울려 지나다니고, 운전자나 탑승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한다.

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듬성듬성 농가가 있다. 붉게 갈아엎어 뭔가 새로 심은 밭과 초지나 묵정밭으로 갈지 않은 밭의 비율이 일대 일 정도 되는 것 같다. 벼를 베고 밑둥만 남은 논이 간혹 보였다. 평야와 얕은 구릉지까지 농지로 볼 수 있겠고, 멀리 큰 산이 아늑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산은 뾰족하지 않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처럼 생긴 산들은 동글납작하게 서로 겹쳐 있다.

비냘레스는 잃어버린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아늑하고 포근했다. 내 속에 각인 돼 있을 것이 틀림없는 어떤 원형(原型? 原形?)같은 것이 툭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 동 틀 무렵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본 풍경은 아마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주인이 목을 밧줄로 맨 시커멓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토종 돼지를 우리에서 끌어 내 풀을 뜯기러 밭으로 나가는 모양이다. 돼지가 주인을 끌고가면서 신이 났다. 하는 양이 우리집 개같다. 돼지는 걸으면서 풀을 뜯는다. 그 옆으로 마무 것도 매지 않은 새끼 돼지 두 마리가 신이 나서 따라가고 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주인과 돼지를 둘러싸고 열 댓 마리쯤 되는 큰 닭과 수십 마리쯤 되어 보이는 병아리들이 웅성거리며 우루루 주인과 돼지를 감싸고 몰려나간다. 깜장털과 누런 털이 적당히 섞여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멍멍 개는 오히려 멀찍이서 살금살금 주인을 뒤따른다. 주인 농부아저씨는 날씬하고 키가 크다. 농사꾼들이 입는 카키색 일복을 입고 일꾼들이 쓰는 밀짚모자 비슷하지만 정방형에 옆구리를 위로 말아 올린 일꾼 모자를 쓰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를 신었다. 허리에 허리띠를 두르고 왼쪽 뒷춤에는 긴 칼(용도가 우리 낫과 같다), 오른쪽 뒷춤에는 짧은 칼을 차고 있다. 농사꾼 머리 위로 유난히 붉고 밝고 큰 해가 살살 떠오른다. 하필이면 이 때 사진기 밧데리도 동이 나고 메모리카드도 꽉 차는 통에 사진을 찍지 못 했다.

아줌마들은 농사일을 전혀 안 하는 모양이었다. 빨래만 하고 청소만 하는지 집집마다 빨래는 엄청나게 널려 있고, 걸으면서 보면 집집마다 집 청소 하느라 야단이다. 집안은 참 단순하다. 그저 흔들의자 몇 개에 침대면 가구가 땡이다. 바닥은 타일이다. 그러니 물청소를 해야 한다. 집안 바닥 물청소하는데 걸리적거릴 게 별로 없다. 겨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두꺼운 이불이나 두꺼운 옷이 필요 없으니 큰 장롱이 있을 턱이 없다. 난방을 안 해도 되니까 집짓기도 쉽고 상하수도시설도 쉽다. 이 동네에서는 풍요로움이 느껴졌다. 물건이 사치스럽고 많다는 얘기가 아니고 사람들이 풍요로워 보였다. 동네가 관광객을 꿀꺽 삼켜버리는 듯했다. 이것이 고집 세고 자긍심 높은 농사꾼들, 특히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소농들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물론 내 맘대로 하는 생각일 뿐이다. [돌발퀴즈의 답. 내가 원한 정답은 버스 안. 우리 연수단이 탔던 좋은 관광버스와 외국인 전용버스는 모두 중국제였는데 냉방이 장난 아니었다. 엄청 추웠다.]

 

아바나시()

아바나는 도()이름이기도 하고 시()이름이기도 해서 엄청 헷갈렸다. 돌아다녀 본 바로는 우리 개념의 시()는 아주 좁은 몇 개 지역에 불과했는데 지도를 보면 상당히 넓어서, 혹시 도를 시로 잘못 써 놓은 건 아닌지 여러 자료를 뒤적거리고 한쿠바교류협회에 전화까지 해서 확인했다. 확인 결과~, 짜자잔!

아바나 시는 15개 구(), 105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라마르니 베다도니 알라마르니 하는 것들은 다 동() 이름이었다.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은 그러니까 아바나 시에서 십 몇 키로 떨어진 곳에 있는 게 아니고, 아바나 시 보제로스 구 무슨무슨 동에 있는 게 맞다. 우리가 갔던 컨설팅 숍과 CPA인지 CSS인지 하는 농장도 아바나시 리사구 무슨무슨 동에 있는 게 맞다. 리사구는 아바나시 서쪽 최고 외곽에 있는 구다. 내가 왜 이렇게 행정구역을 확인하는데 열을 올리냐 하면 도시자체가 쿠바와 우리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뒤로 가면서 슬슬 얘기해 보겠다.

아바나시는 2004년 통계로 인구 210만이고 지금은 250만쯤 된다고 한다. 면적은 728. 섬이고 따뜻한 지역이어서 제주도랑 비슷한 느낌인데, 제주시는 면적 977에 인구가 42만이라서 견주기 어렵다. 면적과 인구가 가장 비슷한 한국 도시는 대구다. 대구는 면적 883247만 명이 산다. 대구는 그런데 살아보지 않았고 두어 번 들른 적밖에 없어서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1960년 서울 인구가 245만 명으로 되어 있다. 당시 서울 면적은 268.35였다. 서울은 중심부에 남산도 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이 차지하는 면적이 꽤 됐을 것이다. 큰 강도 있다. 2009년 말 기준으로 서울 면적은 605.25(157.35), 서울 인구는 10,464,051명이다.

196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서울 토박이(과거 직장 상사)에 따르면 한강에서 멱 감고 놀며 자랐고 주변에 널린 밭에서 서리를 즐겼다고 한다.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 산월리 석화부락이라는 벽촌 구석에 살던 나도 어릴 때 학교 들어가기 전에 엄마 따라 서울 사는 외삼촌 네에 딱 한 번 간 적이 있다. 7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 여기가 서울이다라고 하시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서울이 아니었다. “여기가 무슨 서울이야? 서울 아냐!”라며 바득바득 우겼다. 시가지로 들어가서 높은 집도 나타나고 육교도 보이고 해서야, 드디어 서울에 왔다고 생각했다. 이때 서울 어린이 대공원 가서 하늘로 난 모노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전기차를 타고 찍은 칼라사진이 사진첩에 있다. 시커멓게 탄 시골 꼬마 아이가 운전대를 잡고 앉아 있다.

아바나의 모습은 이런 방식으로 유추해보면 적당할 듯하다. 시가지는 아바나만 서안 조금뿐이고 나머지는 헐렁한 교외 모습이다. 밀집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놀고 있는 빈 땅과 초지가 즐비하다.

쿠바가 자랑하는 상자농법농장, 올가노포니코는 가는 지역마다 보였다. 민가에서도 하고 정부기관에서도 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정부기관에서 하는 게 크고 규모도 제법 되어 보였다. 이래저래 만나지는 꽤 여러 사람에게 남쪽 한국에서 쿠바의 유기농업, 특히 오가노포니코 등을 둘러보러 왔다.”라고 얘기하면 대부분 , 오가노 포니코란 반응을 보였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택시기사 아저씨 한 사람만 뭔 소리래?”라는 반응이었다.

미라말(서울 청담동 같은 동네. 외국 대사관 등이 몰려 있다)의 쇼핑센터는 규모는 조금 작았지만 대형 마트 분위기였다. 채소가 거의 전부인 베다도(서울 남대문쯤이라 할 수 있을까?)의 재래시장은 성황이었지만 화천 오일장보다 작았다. 구아바나의 오비스포 거리(명동)는 삐까번쩍한 첨단 숍이 늘어서 있는 거리인데,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쿠바의 농업

한국 농업은 쌀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처럼 쿠바 농업은 사탕수수다. 혁명 이듬해인 1960930일 쿠바국립은행장 체게바라는 이런 소리를 했다.

 

여러분들은 사탕수수가 쿠바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것입니다. 멕시코의 면화, 베네수엘라의 석유, 볼리비아의 주석, 그리고 칠레의 구리, 아르헨티나의 목축과 밀, 그리고 브라질의 커피.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 우리는 단일 생산을 하는 나라이며 우리 모두는 단일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제국주의자들은 힘을 뻗치기 위해서 우리를 분열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커피, 구리, 석유, 주석, 사탕수수 생산국으로 나눠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멸시킬 더 낮은 가격으로 한정 없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가장 고귀한 재산인 자유와 경제적 윤택, 해결 못 할 어떤 문제도 없다는 자신감을 쟁취하기 위해서.”(장코르미에 지음, 김미선역, 체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2000. 483~485)

 

그러나 쿠바의 이런 상황은 혁명 이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더 강화된 것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경제 블록 속에서 쿠바의 사탕수수, 설탕은 매우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 국제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5배라고 한다)으로 사탕수수를 내다 팔아서 나라 살림살이를 했다. 사탕수수 생산량이 가장 많았을 때 800만 톤에 달했다고 한다(우리나라 연간 쌀 생산량은 400만 톤 정도이고 쿠바의 사탕수수 생산량은 지금은 거의 반 토막 난 상태라고 한다). 그러니까 설탕 비싸게 팔아서 석유도 사고 먹을 것도 사고 차도 사고 뭐든지 필요한 걸 사다 쓰면 되는 거였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으로 섬유잡화식품화학 산업에서 출발해 전자자동차철강조선석유화학정보통신 등 소위 말하는 국가기간산업을 키우느라 쎄가 빠지고 있는 동안, 쿠바 인민들은 사탕수수 농사나 조금 지으면서 신나게 띵까띵까 놀았던 것 같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무상의료무상교육무상주택무상급식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 의료교육 등을 정부가 거의 완벽하게 책임지는 가운데, 인민들은 적은 시간 일하고 많은 시간 놀았다. 그러니까 일하는 대신 공부하고 운동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마치 든든한 부모를 둔 유학생 같은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도 발 벗고 나서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을 위해서도 자선의 손길을 내밀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쿠바의료진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각국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서른 해 만에, 잔치는 끝났다! 돈 붙여주던 부모님 사업이 망해버린 것이다. 쫄쫄 굶어 가며 먹고 살길 찾느라 십여 년이 흘렀고 일 시작하고 벌이느라 또 십여 년이 흘렀다. 안하던 일 새로 배워 하느라고 고생 꽤나 했지만 이제는 제법 그럴 듯한 직장(관광)도 생겼고, 비전이 보이는 새로운 사업(유전생명공학에 기초한 의약품 생산)도 자리를 잡아 간다. 성공한 친한 친구(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아뿔싸, 기본이 안 돼 있다. 이십 년 생고생하며 앞만 보고 뛰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상전벽해, 갈 길이 구만리다. 교통정보통신금융 같은 기본적인 사회경제 시스템을 손도 대지 못 했다.

우리 세대로 치자면 대학 다니는 동안 열심히 사회운동 하다가 마지 못 해 직장으로 떠밀려 들어가 쓴맛 단맛 다 보면서 이제야 좀 철도 들고 자리도 잡아가는 삼십대 초반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겠고, 젊은 시절 품었던 꿈과 이상도 절대 포기할 수는 없고, 이 불꽃 튀는 절대 모순 속에서 해법을 찾아 아직 아무도 풀지 못한 숙제를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새 길을 찾아가는 젊음이라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는 바꾸어 얘기하면 세파에 시달리느라 젊은 시절 순수했던 맛도 다 사라졌고, 아직 세상에 완전히 정착한 것도 아니어서 안정감이나 원숙감이 느껴지지 않는, 한 마디로 이도저도 아닌 맹탕이란 소리이기도 하다. 내가 전반적으로 느낀 쿠바는 그랬다. 치열한 맹탕!

대한민국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그동안 축적해온 사회적 부()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골고루 퍼짐으로써 내수시장을 키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이후 20년 동안 자동차정보통신금융석유화학 산업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성과를 거뒀으며, 그러니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라도 한 쪽으로 쏠려 있는 부의 재편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설()이 있는데, 나는 이 설()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농가 소득과 도시 가구 소득의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 때, 1980년 중반부터다. 한국이 이러고 있을 때, 쿠바는 어둠 속을 헤매느라 아무 짓도 못 했을 것이다. 20년을 까먹은 것이다.

다시 얘기를 농업부문으로 돌리면, 농업은 여타 산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농기구와 농기계 농자재는 외부로부터 들어와야 하고, 생산물은 포장 이동 가공 소비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농업 역시 여타 산업부문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사회경제적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 쿠바의 유기농업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연수기간 내내 우리 일행은 끊임없이 토론하며 여러 쟁점을 도출해 냈다. 쿠바가 준 최고의 선물은 그래서 그들이 이룩한 성과 보다는 오히려 유기농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쿠바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문제의식을 고취시킨 점이 아닐까 싶다. 정치 사회 경제 체제가 모두 다른 가운데 공통점이라고는 유기농업 하나뿐이기 때문에 유기농업이라고 하는 것을 매우 근본적인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쿠바는 끊임없이 우리를 압박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는 우리의 유기농업을 비추는 거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쿠바의 유기농업, 우리를 비추는 거울

나는 사람들이 다음 두 가지 경우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값이 싸서, 살 수 있는 돈은 있는데 살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있다. 그리고 물건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는 상황도 있다. 어느 게 더 나쁠까?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이렇게 멋지게 한 마디로 압축해서 대비시킨 사례가 또 있을까? 으하하하 깔대기! 실제로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89월 계속해서 비가 쏟아진 해, 10월 초 추석 장을 보는 주부가 생협대형 마트에서 마주치는 상황이다.) 쿠바의 음식 조달 상태는 앞의 상황으로 보였다. 쿠바 시민들이 사는 먹을거리 값은 터무니없이 쌌다. 유기농산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쿠바에서 만난 여러 농업 관계자들에게 유기농업은 안전하고 품질 좋은 농산물을 시민들에게 아주 저렴하게공급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쿠바의 유기농산물은 원가가 싸다. 비싼 화학비료를 안 쓰고 비싼 화학농약도 안 쓰고 비싼 제초제 같은 것도 안 쓰고 농기계도 안 쓰고 비싼 석유를 때며 멀리 운송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국가 전체를 하나의 경제단위로 봤을 때, 외부에서 사다 써야 하는 걸 소비하지 않고 모두 내부에서 조달할 수 있는 걸 써서 생산 유통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생산한 농산물은 원가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국민들에게 거의 무상에 가깝게 공급할 수 있다.

그런데 쿠바 국민들이 정말 이처럼 값싼채소를 먹고 있는 것인지 한 번 보자. 알라마르농장에서 생산하는 채소를 우리식으로 원가 계산을 한 번 해 보면 좋겠는데, 비용을 다 합하고 생산물을 단순 키로() 수로 환산해서 나누면 키로그램당 원가가 나올 것이다. 먼저 땅값이 있다. 알라마르 농장 위치는 마포 언저리쯤 돼 보인다. 33천 평이면 값이 얼마나 될까? 땅값에 들어가는 금융기회비용을 일단 생각해 두자. 그리고 인건비가 있다. 일하는 인원이 150명이 넘는다. 도시 평균 근로자 소득을 대입하면 되겠다. 그리고 농자재나 농기구 같은 건 다 자급자족한다고 하자. 연간 얼마나 많은 채소를 생산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계산하면 알라마르 농장에서 생산하는 채소 양만큼의 금덩어리를 살 수 있는 정도의 비용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아바나 시민들이 먹는 상추의 가치는 말 그대로 금추다. 그들은 사실은 무지무지하게 가치가 있는 상추를 거의 꽁으로 먹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시켜 놓고 보면, 여기서 많은 함축을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첫째가 유기농업을 하는 사회경제적 혹은 국가단위에서의 동기다. 한마디로 하면 유기농업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라는 질문은 너무나 포괄적이어서 막연한 느낌을 준다. 조금 좁혀서 동인으로 해석하면 편하다. 그러니까 농사꾼이 왜 유기농업을 하느냐? 소비자가 왜 유기농산물을 먹느냐? 정부는 왜 유기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느냐? , 이런 것일 텐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접근법은 역시 돈, 즉 경제다. 우리 연수단 내부에서도 이런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되었다.

시장에 고품질고가격고안전 농산물에 대한 작은 수요가 존재하고 이런 소비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경제활동으로 유기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당연한 얘기다. 농사꾼도 돈이 돼야 일을 시작하는 것이고, 소비자는 지불한 만큼의 대가를 돌려받아야 하고, 정부는 이와 같은 거래가 공정하게 잘 이루어지도록 관리 감독하고 소비자는 또 한편으로 납세자이기도 하므로, 납세자들이 원하는 바가 실현되도록 정부 예산을 적절하게 투입할 의무가 있다. 또한 거래가 공정하게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제품의 품질에 대한 규정을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인증제도가 출현한다. 이런 시장중심 경제중심의 논리는 우리나라 유기농업계가 흘러가는 하나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유기농산물의 거의 유일한 시장역할을 하고 있는 생활협동조합의 급속한 팽창과도 맞물려 있다.

유기농업의 상업화 세속화 혹은 규모화 규격화라 부를 수 있는 이런 흐름은 조금 더 근본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비판받는다. “유기농업이 뭔데? 돈 벌려고 유기농업을 해? 관행농하고 다를 게 뭐 있어?”라는 식이다. 쿠바는 이런 질문이 더 극명하게 드러나도록 돕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두 번째로는 유기농업이 그럼 뭐냐?”는 정의의 문제다. 국제연합 UN산하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식품의 국제기준을 정하기 위해 만든 코덱스위원회(CAC)는 유기농업을 생물다양성, 토양의 생물학적 활성화, 그리고 자원의 생물학적 순환을 더욱 고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생산하는 농업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거래를 위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호 계약 형태로 작성된 인증제도하고는 사용하는 용어부터가 사뭇 다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역사성 없는 이념과 맨땅에 삽질하며 박박 기면서 만들어낸 역사성 혹은 현장성의 차이로 나는 이해한다.

우리나라 시골 할매 할배들은 유기농업 혹은 친환경농업이란 말은 낯설다. 그냥 으응~, 무공해농사그러신다.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는 기가 찼다. 그러면 일반 농사는 공해농사란 말인가?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 친환경 농업의 개념은 친환경이라는 말보다 무공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는 부정어다. 친환경농업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도 농약이나 비료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농사다. -환경보다는 무-공해에 더 가깝다.

우리나라 유기농업은 그러니까 친환경성보다는 무공해성으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1980년 중반 원주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한살림운동과 생활협동조합운동이 당시에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공해추방운동과 같은 환경운동과 맞물려 인식되면서 그리 된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우리 유기농업의 역사는 이런 맥락 위에 서 있다. 급격한 산업화로 농촌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고독성 농약과 제초제 등의 파괴적인 영향이 가시화 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것이 초기 소박한 형태의 유기농업운동이다. 농사꾼은 가혹한 농업노동을 감내하는 희생을 치루고, 소비자는 보잘 것 없고 생산량도 미미한 농산물을 고가에 구매해 주는 희생을 치룸으로써, 양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비로소 서로 상생한다는, 상호 희생을 통한 상생을 이념으로 삼았다. 이른바 농사꾼은 소비자의 밥상을 안전하게 책임지고 소비자는 농사꾼의 살림을 책임지자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농산물의 안전성”, “소비자의 건강”, “농사꾼의 살림살이같은 것들이다. 물론 농약과 제초제 살포 과정에서 농사꾼에게 가해지는 치명적인 손상같은 것들도 중요한 이야기 거리의 하나였으나 이후 논의의 전개과정에서 사담 수준으로 격하되고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자리잡지 못 한 채 사적인 것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환경과 생태 생명의 의제 역시 소비문화의 급격한 확산 속도를 따라잡지 못 한 채 지체되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우리 연수단의 지도교수로 함께 한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님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부 재직시절 친환경농업 원년을 선포했던 내가 쿠바를 먼저 오고 장관을 했다면 우리 유기농업 환경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유기농업을 하는 첫 번째 목표가 건강이 아니고 환경 생태를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건강이고 세 번째는 저투입 저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이 순서를 올바르게 하지 못 한 데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

농사꾼의 살림살이 의제는 높은 가격으로, 농산물의 안전성과 소비자의 건강 같은 의제는 인증제도로 수렴되었다. 생활수준 향상과 2000년대 초반의 갑작스런 웰빙열풍으로 친환경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요즘은 책임 생산같은 구호가 나풀거린다. 친환경농업을 육성하고 촉진하도록 강제하는 법제도가 정비되었다.

집에서 어렵게어렵게 연구 개발해서 쓰던 여러 농자재 생산기술이 쓸모없이 되었다. 각종 농자재의 홍수 속에서 유기농업 역시 석유를 때는 대형 농기계로 땅을 갈고, 수입해온 원료로 만든 유기질 비료를 대량 투입하고, 수입 사료를 먹고 싼 가축의 분뇨를, 역시 수입해온 미생물 자재를 이용해 발효시킨 퇴비를 대량 투입하고, 비닐을 씌워 밭을 준비하고, 수입해온 씨앗을 파종해가지고 난방해서 키운 모종을 이식하며, 역시 수입한 원료로 만든 값비싼 친환경 제재로 병충해를 방제해서 생산한 농산물을 전국 단위의 중앙집중식 물류를 하는 유통망을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이와 같은 고투입 고산출 단품종 대량생산 장거리 수송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과연 유기라는 말로 수식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그럼 진짜 유기농업이 과연 뭐냐?”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쿠바는 우리에게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답을 찾도록 촉구하고 있고, 우리 연수단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을 나누었다고 나는 느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 농업계의 극히 일부에서 농사짓는 유기적 방식뿐만 아니라 생활양식과 농사규모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소농(小農)”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그룹이 있다. 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인 전희식에 따르면 소농은 순환, 자립, 공동체성을 실현하는농사로 자연에 살며시 얹혀살며 자연의 복원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짓는 농사”(전희식, 소농 이것이 진짜 혁명이다, 2011)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 소농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과 소농으로의 사회적 이행과정과 방식 등을 제시하지 못 하고 개개인의 생태적 각성과 실천적 결단을 요청하는 원론적인 선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인구밀도가 높고, 소비수준도 높고, 고도로 산업화되어 있고 모든 것이 수없이 많은 관계망으로 얽히고설킨 이런 사회에서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기농업 혹은 이념으로서의 유기농업을 실현한다는 것은 이인(異人) 내지는 도인(道人) 수준에 이르지 않고 서는 불가능하다. 이는 내가 입고 있는 빤쓰 한 장의 역사만 찬찬히 추적해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빤쓰 한 장에도 전세계인의 피와 땀과 눈물과 영혼, 즉 노동이 스며있다.

유기농업이라고 하는 이념의 비를 하늘에서 땅위로 쏟아 내리는 대신 지금 여기서 출발해서 단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게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지금까지 이루어온 무-공해 농업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한 발 더 내딛어 친-환경농업으로 이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너무 넓은 땅을 너무 힘들게 너무 많은 시간 농사짓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유기농업을 둘러싼 의제 설정이 중요하다

요즘 프레임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한국의 농업 혹은 유기농업과 관련해서도 이는 정말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레임을 잘 짜야 성공할 수 있다. 내가 제시하는 건 공공재 프레임이다. 대강의 얼개는 이렇다.

농산물은 공공재이다. 공공재는 남녀노소 부자 가난뱅이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서비스되어야 한다. 공공재의 첫째 조건은 안전성이다.

공공의 재화를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 즉 책임과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세금도 내고 교육도 받고 공부도 하고 성실히 일을 해서 성과를 내고 필요한 서류도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한편 정부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일정한 수의 공무원을 확보해야 하고 이들이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독성 물질 살포와 같은 위험한 일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적절한 방식으로 이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한다.

쿠바는 이렇게 하고 있다. 이것이 쿠바 유기농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인 것 같다. 농사꾼 생존권을 보장하라, 농사꾼 먹고 살기 힘드니까 도와 달라, 이런 건 이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농사꾼인 나조차도 별로 공감이 안 된다. 도시 비정규직 노동자가 1,000만이 넘는 시대다. 이들에 비하면 농사꾼들 먹고 살만하지 않느냐라고 누가 물으면 뭐라 답할 것인가? 고령 농가? 고령 영세 농가는 사회 복지 시스템이 작동해서 보호하도록 해야 한다. 이미 은퇴할 나이를 지난 이 분들을 볼모로 잡고 농업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해서는 안 된다.

농산물이 왜 공공재냐라고 누가 물었을 때, 가장 강력한 논거가 되는 것은 농업의 다원적 기능 여덟 가지(국토보전기능, 수자원 함양, 자연환경의 보전, 경관의 형성, 보건 휴양, 문화적 소산의 전승, 지역사회의 유지 및 활성화, 식량안전보장 등)이고, 이런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대표적인 작물은 쌀이다. 농사가 농사꾼 개인의 사적인 경제 행위가 아니고 국방이나 치안 기초행정업무 등과 같은 공공서비스로 정의되고, 농산물이 공공의 재화로 자리 잡고, 농사꾼이 공무수행요원으로 정착되는 첫걸음은 그래서 당연히 쌀부터 시작해야 한다. 쌀로부터 시작해서 잡곡으로 점차 확대하고 기초농산물 전반으로 확대하고 최종적으로 전체 농산물에 대해 시행한다.

한 가구가 충분히 친-환경적인 방식(자원순환, 생물다양성 증진, 생태계 균형 유지를 목적으로 토양의 생물학적 자급력과 비옥도 증진을 위한 과학적 실천으로서 의 농경)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적정 규모를 산출한다. 우리 친환경 쌀이 가공식품의 원료로 쓰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격을 낮춘다. 농사꾼은 적정 규모의 농사를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지어야 하고, 매년 일정 시간 이상의 친-환경 농업과 관련한 교육을 받아 자격을 획득 갱신하여 스스로 친환경농업인의 여건을 갖추고 있음을 입증한다. 농업 소득에 대해 세금을 충실히 납부한다.

쌀농사를 짓는 가구가 쌀값을 받아 지출해야 하는 소비지출 항목 중, 의식주교육의료 등 기초생활비에 해당하는 소비지출에 대해서는 사회가 완벽하게 무상으로 농가에 제공한다. 쌀값을 충분히 낮춘 데 대한 대가다. 예를 들면 농가 자녀에 대해 학비는 물론 학습 도구 구입비와 도시유학 시의 주거 제공 및 일정한 생활비 지급 등을 포함하는 완벽한 무상 교육 서비스, 치과 치료를 포함한 완전한 무상 의료 서비스, 일정한 수준의 겨울 난방비 지급, 주택 수리 및 관리에 들어가는 일정한 비용 지급 등이다.

이것은 소비자와 농사꾼 사이의 일종의 사회적 거래다. 서로에게 아주 좋은 거래라 생각한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50대 이하의 합리적인 사유를 하는 젊은 농사꾼들은 이와 같은 방식의 거래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이 거래가 잘 작동하도록 인센티브(쿠바에서 얼마나 자주 들은 말인가!)와 페널티를 치밀하게 배치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일본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이 몰려와서 헐값인 우리 쌀을 막 사가려 할 수 있으므로 쌀 국외 반출에 대한 규제도 마련해야 한다. 물론 북한에서 쌀 사러 오면 더 싸게 DC해 주는 게 좋겠다.

후계농업인을 확보한 농가가 4%밖에 안 되는 초초고령화된 농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미래에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농촌이 유지될 수 있는 최후의 유력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키워드는 농산물=공공재.

 

쿠바의 유기농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제 할 말은 다 했다. 여기서부터는 사족이다. 쿠바에 유기농업과 관련한 연수단이 수차례 다녀오면서 이런저런 논란이 있는 듯하여, 논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참견하기 좋아하는 나는, 2012년 대산농촌문화재단 쿠바유기농업연수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쿠바의 여러 유기농업관련기관을 방문하고, 또 여러 날을 더 남아 여기저기 현장을 둘러보고 온 자로서, 나도 이런저런 논란에 한 발짝 살짝 얹어볼까 한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초현실적인 진리는 없다. 예컨대, 농업과 유기농업을 포함해서 생태 환경을 둘러싼 모든 논의의 밑바탕에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핵심 개념이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나처럼 자식도 없고 삐딱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대체 왜 지속가능해야 하는 건데?”라고 삐딱선을 타는 순간 우리는 아마도 난이도가 가장 높은 철학 논술고사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내가 쿠바의 유기농업과 관련해서 말할 때, 대전제로 삼는 것은 이것이다. 초현실적인 절대진리는 없다.

따라서 쿠바의 유기농업은 쿠바라고 하는 사회의 내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고, 이와 같은 흐름이 우리에게 혹시라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게 나의 관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총평해 보자면 이렇다. 국제적으로 널리 칭송되는 쿠바의 유기농업은 쿠바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필요에 부응하는 대단히 훌륭한, 칭송받아 마땅한 정치적 액션이었다라는 하나마나한 듯한 말이 나의 총평이다.

우선 정치적으로 볼 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교과서적인 전술을 구사했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의 의식주의료교육을 거의 완벽하게 책임져온 정부가 식량 부족 사태에 직면했으니 이건 정말 완전 체면 구기는 일이다. 우리 같으면 쪽팔려서 쭈그러들었을텐데 쿠바는 달랐다. 위기를 기회로 돌려놓았다. 식량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수세적 상황을, 유기농업을 동원해서, 우리는 지금 인류가 당면한 보편적인 문제를 앞서서 해결하는 중이라는 식으로 공세적으로 해석해버림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나 물리적 측면에서나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공히 위기를 타개하는 돌파구를 만드는 데 유기농업은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유기농업은 국제사회로부터 각종 지원금(외화)을 불러 들이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듯하다. 쿠바 정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국제사회가 안심하고 각종 목적자금을 송금할 수 있도록, 유기농업을 동원해서 반민반관의 성격을 띤 다양한 기관을 조직해 낸 걸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의 유휴인력(명퇴자, 고령자, 실업자 등)을 흡수해 관리하는 사회 안전망이자 건강관리실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요거는 연수단 채성석 형의 통찰을 수용한 것이다).

이렇게 내적 맥락을 짚어 헤아리면 좋은 점이, 앞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신컨대, 이러한 쿠바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필요가 다하지 않는 한 쿠바의 유기농업은 후퇴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2012년 쿠바의 유기농업은 고난의 90년대와 회복기의 2000년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는 매우 강력했을 정치-경제적 동인(動因)은 많이 소진된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상황이 나아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동인은 작동하고 있고, 더욱 강해지는 중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으며, 특히 재정적자를 줄이고 사회의 역동성을 강화하기 위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다. 관광산업이 촉발하는 소비욕구의 증대(=신선채소에 대한 수요 확대) 또한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쿠바 사회에서 유기농업을 요청하는 사회적 동인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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