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사꾼이다 : 시즌1->시즌2 : 2005.6.29.

[출처: 내 홈피 "농부네 마을" 인사말씀 게시판]

낯 모르는 분들께도 감자를 열심히 팔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조금 자세히 제 소개를 해 보겠습니다.

당연히, 좋은 점, 드러내고 싶은 점만 골라서 짜집기 하게 되니까,
좀 거시기한  부분이 있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상업적 목적의 글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길...

 

백승우(1969년생)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밝은땅, 백수(伯秀), 단지(장단지, 똥단지 할 때 단지. 丹志 붉은 뜻...사상적으로 뽈갱이, 사회주의자라는 의미), 느림바우, 늦눈, 무소음(無騷音), 농부, 놀부 등이 있지만 '백수' "농부' 정도만 조금 알려졌지, 나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토회 법륜스님이 하시는 <금강경> 강좌를 듣고,
법륜스님으로부터 <보관 普觀 - 넓게 보고 고르게 보고 바르게 보라>이라는 법명을 받고, 계도 받았다.

***번역한 책이 한 권 있다
<아미쉬 공동체>(들녁, 2002. 공역)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찾아 들어가다가 이 책을 만났다.
지금도 미국 한복판에서,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수도자 옷을 입고 살아가는,
고집불통인 데다가 선민의식까지 갖고 사는 사람들.
이들이 사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흔히, 공동체에 대해 잔뜩 거품만 집어넣는 그런 책이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황을 담고 있다.
행복, 슬픔, 기쁨, 고난, 위기, 기회, 애 키우기, 돈 벌기, 규율, 처벌 등등등

이 책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한 방에 날아갔다.
사람 어울려 사는 거, 쉽지 않다.
꼬부랑 글씨로 된 책 붙들고 혼자서 끙끙거리다가 동생들 도움을 받아 겨우 책을 냈다.

***어리부리 쓴 책이 두 권 있다.  

<면접딱풀-면접, 딱 하나면 술술 풀린다(2004)>(면접 가이드 북, 정동수와 공저)=>후에 <면접의 기술>로 재출간.

<도시농업 생태텃밭 가꾸기(2004)>(텃밭 가꾸기 가이드북. 안철환 형과 공저)=>후에 <유기농 텃밭>으로 재출간.

첫번째 책은, 그 동안 첫회사 입사 동기인 동수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던 터에,
동수가 자기 경험을 책으로 쓰고 싶다고 해서, 빚 갚는 심정으로 열심히 써 준 것이다.
미루고 미루느라 초고에서 완성까지 5년쯤 걸렸다.
물론 돈이 좀 될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돈은 전혀 안 되고 말았다.
면접서로 이만한 책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펼친 인해전술이 사실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는 얘기도 나오는,
놀라운 면접 가이드북이다.    

두번째 책은 철환이 형이 자기 바쁘다고 몇 가지 작물 원고 좀 써 달라고 해서
오전에 밭일 하고, 오후에 학원 가서 선생노릇 하고 밤 늦게 돌아와 밤을 새워 가면서 썼다.
역시 훌륭한 책이다.

***계간 <귀농통문>에 <잡곡 농사 짓는 방법>에 대해 여러 회에 걸쳐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농사짓는 분을 찾아가서 말씀을 듣고 그대로 글로 옮기는 작업이다.
글 쓰는 내게 많은 도움을 준다.

***도시농업위원회에서 개최하는 <도시농부학교>에 가서 강의한다.
강의 주제는 <콩 농사 확실히 망치는 비법 다섯 가지>.
4년 동안 콩 농사 망친 얘기를 들려드린다.

***대안교육연대에서 주최하는 <대안교육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일년 동안 감리대 송순재 교수와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 현직 선생님들이 함께 하는
<교육 사랑방>에 열심히 나갔다.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올라다녔다.
어디서 이런 정성이 나왔을까?

***2004년 총선 때는 민주노동당 춘천시지구당에 자원봉사하러 나갔다가
홍보실장이라는 벼락감투를 쓰고 일 했다.

***학원에서 초중등 애들한테 수학과 논술을 가르쳤다.

***경실련정농생협 소식지 편집일을 잠깐 했다.

***춘천생활협동조합 만들 때, 사무국장으로 몇 달 일했다.

***정부에서 선정해서 1억원을 연리 4% 5년 거치 10년 균분 상환을 조건으로 꿔주는
<취농창업후계자>로 선정돼서, 그 돈으로 땅 3천 2백여 평을 사서 드디어 어엿한 농부가 됐다.


1997년 5월.
아이엠에프를 예고하는 감원 바람이 불었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속에
유치환의 시 '바람'을 인용하며 '퇴사의 변' 어쩌구를 써 놓고, 사표 휙 던지고 백수가 됐다.

<유치환의 시 '바람' 앞부분>
"바람과 나는 同氣, 우주의 가장 묵은 一門의 후예로서
세계의 어디메도 안주할 곳을 갖지 못한 영원한 표박인,
쉼없이 뉘우치고 탄식하고 회의하고 헤매야 하는 운명,
어느 때나 내가 안식의 유혹에 이끌려 전후를 모르고 잠드는
밤이면은 나의 형뻘인 바람은 찾아와 간곡히 창문짝을 흔들고
양철지붕을 두들기며 나를 절망의 본연으로 일깨우나니..."

1997년 7월~8월
박경리 아줌마가 이십 오년 정도에 걸쳐서 쓴 '토지'를 보름 남짓 만에 다 읽어 치웠다.
책 읽은 거를 여러 관점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한 마디로 <조선 농민의 복권>---
복권은 로또나 주택복권 같은 게 아니고, 권리를 되찾음이란 뜻이다---이라고 단정지었다.
이 소설로 조선 농민은 자신들의 <품위>를 되찾았다.
이 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시골에 내려가 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97년 8월
열심히 돈 모아서 시골 갈 생각으로 다시 돈을 조금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갔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김근희 간사, 재동 한옥집 방 한칸 사무실 시절이었다.  

1998년

봄.
귀농본부에서 충남 홍성으로 현장학습을 갔다.
거기서, 부본부장인 장길섭 형의 강의를 들었다.
장길섭 형은 <녹색평론> 편집장으로 있다가 관두고 5년 정도 풀무원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공동체생활......하다가......대부분 그렇듯이, 형수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됐을 때......
공동체를 벗어나 충남 홍성으로 내려가서 자리잡고 막 농사짓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나는 길섭이형 강의를 듣고 귀농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때, 같이 강의를 들었던 분들은 길섭이 형이 무슨 사이비 종교 교주같다고들 했다.
<귀농교주 장길섭>이라... 우하하~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교주 비슷한 면모가 있다.
길섭이 형은 스스로를 '무뇌아'라고 비하할 만큼, 일단 말문이 열리면 제어가 안 되는 분이다.
그 때는 그러나, 그런 거를 알 수가 있었나, 어디!

가을,
귀농학교 7기 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끝물 고추 딸 무렵, 포천 김준권 선생 댁으로 현장학습 갔을 때,
안철환 형, 우평주 형 등을 얼핏 스치듯이 만났다.  

철환이형은 이 때만 해도 마초 비스무리한데다가
(유기)농업 자체보다는 출판쟁이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그러나 지난 7년 동안 철환이형은 정말 괄목상대했다.

지금은 내가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깊은 눈과 따뜻한 가슴으로
농사를 짓고, 사람들을 농사로 이끌고, 농업과 농촌의 미래를 설계하느라 바쁘다.
게다가 책까지 열심히 만들어 낸다.
직접 쓰고, 번역하고, 기획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블랙홀처럼 힘이 쎄다.

평주형은 지금 홍천에서 양채류 농사를 짓고 있다.
장수로 내려간 소나무 식구들이나 세용씨, 나 사이에서 평주형은
<인간 제초기>, <인간 수확기>, <인간 모종기> 등등으로 불리며, 인생의 절정기를 맞고 있다.

"시골 내려가면 하루 네 시간만 일하고 살 수 있다"고 사람을 현혹하던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냐고 힐난하니까,

여느 겡상도 사람과는 영 땅판인, 형 특유의 느리고 어눌한 말투로다가
"재밌잖아요"

이 한마디로, 내 뒤통수를 후려친 장본인이다.
재미로 농사를 짓는다?....허~ 참.


겨울
시골로 갈 뜻을 밝히고 회사를 그만 뒀다.
회사 생활하는 동안 김신환 당시 부장님한테서 <헝그리 정신>과 <무대뽀 정신>을 주입받았다.
고장난 경운기처럼 탈탈대던 나는 이후로 성난 불도저처럼 일하게 됐다.

한편,
경북 울진군 서면 쌍전리 사시는 강문필 형님을 졸라 농지 3천평을 평당 만원에 샀다.
강문필형님은 한살림이 배출한 최고 스타다.

버트, 그러나,
땅은 있는데 집이 없어서 무척 당황, 집 짓는 기술을 배워서 손수 집을 짓겠다고 생각,
집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집 짓기는 향후 5년 동안 설계도만 그리다가 집어 치웠다.
최근에 지적했듯이, 집짓기는 소비활동이고, 소비 중에 가장 큰 소비다.
쥐뿔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집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귀농학교를 마치고, 소비가 아닌 생산으로 생각의 중심을 바꾸는 데 대략 5년 정도가 걸렸다.
나는 이처럼 느리고 둔하다.
넘들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하더라도 절대 넘어가지 않는데,
나는 홀딱홀딱 잘 넘어가는 데다가 한 번 넘어가면, 다시 돌아오는데 시간이 이렇게 많이 걸린다.
어리석다, 백수여~~)

이 해 겨울은 무척 추웠지만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돌아다녀도 추운 줄을 몰랐다.  
<희망>은 가끔 난로 역할도 하는 모양이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귀농통문> 8호 엮어 내고, 편집위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엄벙덤벙 아무 것도 안 하다가 1년 후에 짤렸다. 편집위원은 봉사직이다.

1999년

2월.
안철환 형, 차성건 형과 함께 여행했다.
부안 정경식 형님네 들렀다가 전남 화순 김재철 선생댁으로  갔다가
천연염색하시는 토벽 정옥기 선생댁을 거쳐 올라왔다. 즐거운 여행이었다.

차 안에서 수다떠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철환이형과는 이렇게 인연을 맺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요즘 내가 딱 하면 척 하고 알아듣는 사람은 철환이형밖에 없다.

3월
이었을 것이다.
전남 화순 전통 한옥 짓는 대목수 김재철님 댁에서
홀애비들과 어울려서 집짓는 일도 배우고, 농사도 지으면서 공동체 비슷하게 살기 시작했다.

집도 지어보고, 죽염도 구워보고,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뒷산 더덕 수백 뿌리를 아작내고, 다마금이라는 전래 볍씨로 손모 내서 논농사를 짓고,
우렁우렁으로 나락 떨어서 까불러서 먹어보기도 했다.
진돗개 <여름이>를 키웠다.
아궁이에 불도 실컷 땠다.
야생 차 잎을 따다가 덖어서 차를 만들기도 했다.

묵은 밭 개간해서 홍화 심고, 놀고 있는 버섯 재배사 얻어서 느타리도 재배했다.
나는 정부 돈을 빌려서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는 데 반대했다.
내 의견을 무시하고 버섯 재배사를 또 얻는다면, 나는 그만두겠다고 했다.
버섯일은 잘 되는 듯 했다.
동거인들은 사업을 늘리기로 결정하고 추진했다.
나는 그만 뒀다.
결국 버섯 농사는 실패했고 나를 제외한 분들은 빚을 짊어지게 됐다.  
아예 일에 끼어들지 않았던 경복궁 목수 조준형-장한나 부부는 순천 낙안읍성마을 근처로 떠났다.
나도 짐을 쌌다.
그 뒤에 함께 살던 분들도 지리산으로, 광주로 모두 떠났다.

아이엠에프 여파로 비틀대던 내 경제는 울진 땅을 팔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
귀농학교 후배고, 방송사 피디, 프로덕션 운영 등을 하시던 분이 울진 땅을 샀다.
이 분은 그 땅에 집을 근사하게 짓고 부모님까지 모시고 잘 살고 계신다.

2000년

2월
화순을 떠나오기 직전, 단식을 했다.
묵언 단식이라고...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었다. 오직 물만 마셨다.

궁지에 몰려서 "우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문득 "행복해야 한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행복해야 한다"라는 답이 왔다.

단식하면서 맨 생각나는 게 집사람하고 같이 먹었던 햄버거며, 빵이며, 과자며 이런 것들이었다.
뭔가 신비롭고,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지 않는, 현상계의 저 편,
저 언덕 너머에 있을지 몰르는 진리와 지혜의 빛, 그 언저리라도 기웃거릴 수 있을까 싶어서,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하고 삼칠일(21일)을 버텼는데, 꽝이었다.  

4월
짐 싸서 올라왔다.
도시로 돌아온 기념으로 집사람이랑 "꽃을 따라 북상하는" 여행에 나섰다.
화순 일대에 퍼져있는 정자와 섬진강 따라 피어난 벛꽃을 보고 완도를 거쳐 제주도로 건너갔다.

제주도에서 고사리 꺾어 데쳐 말리고,
시장에서 장봐다가 밥 해먹으면서 여행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때 나는 <보고 스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앞에 한없이 머무는 것이 여행이다>라는 여행관을 확실히 했다.
휙휙 지나치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지금도 그렇다.

저 남쪽 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와 집에 와 보니, 온갖 꽃이 만발해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파랑새를 찾아 나섰던 치루치루와 미치루 처럼...다시는 이런 여행 안 하기로 했다.
가만 있어도 온갖 꽃은 지가 알아서 다 핀다.
노자는 지네 동네 말로 "不出戶 知天下(불출호 지천하 - 집에 가만 앉아서도 천하를 안다)" 그랬다.
왜 내가 깨닫는 것마다 짜슥들, 미리 다 얘기해 버린 걸까? 김 빠지게 스리...

5월
벤처 열풍 끝물이었다. 세상이 뒤숭숭하고 직장 구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실무급은 나를 원했지만, 사장님들은 사람보는 눈이 있었다.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나는 어찌어찌해서 겨우 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다섯 달 근무가 한계였다.  

밤에 산보 나갔다가 달을 보면, 두고 온 강아지 <여름이> 생각이 났다.
목을 길게 빼밀고 여름이를 부르며 섧게 울었다. 우~~~~우~~~~

10월.
회사를 관두고 맨 처음 한 일은 치질 수술이었다.
옥수역 근처 <송도병원>이 치질 전문 종합병원이다.
치질 있는 분은 여기 가서 수술하면 낫는다.
홈피도 있으니 병원 이름으로 검색해 보시라.

난생 처음 며칠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명당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히 깨닫는다.

******************
명당 (2003. 10)

저는 오랫동안 치질을 앓다가
사람들이 21세기를 맞는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던 무렵에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안하고 나숴볼 생각이었는데, 보통 병은 만드는데 걸린 시간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정성껏 돌보고 돌봐야 나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까마득해서,
"수술 하고 나면, 완전 딴 세상에 살 수 있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
그냥 수술 해뻐렸습니다.

이 때에, 여럿이 쓰는 병실에서 수술 대기 하고 있었는데,
제가 들어간 방에 사람이 많아서, 처음에는,
맨 나중에 들어간 제가 문 옆 침대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제일 안쪽, 제일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수술을 마치고 퇴원했습니다.
저는 후다닥 달려가서 그 자리를 차지했지요.

제가 옮겨간 자리 바로 옆 사람이 퇴원해서, 병실에서 두번째로 좋은 침대가 비었습니다.
제가 문간에 있을 때, 바로 제 옆에 있던, 병실에서 두번재로 안 좋은 침대를 쓰던 사람이,
후다닥 달려와서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달려와서 제 옆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수술을 하고 나오고,
저도 수술을 하고 나왔습니다.

밥을 먹는데요, 아침밥 먹을 때, 어두컴컴하거덩요.
옆사람이 수술한 게 탈이 났어요.

난 침대에 앉은 채로, 침대에 딸린 상을 척 땡겨놓고 밥을 먹는데,
바로 옆자리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간호사가 손전등으로 아저씨 똥꼬를 비추고
의사는 실로 꿰메고, 피투성이 솜뭉치가 휴지통으로 휙휙 날라가고, 우갸갸!
고개만 살짝 돌리면, 아니, 그냥 안 볼려고 기를 쓰고 있어도,
눈으로 들어오는 풍경입니다.

이때에 저는, 태연하게
숟가락으로 밥을 뜨고, 국을 떠서 입으로 가져갑니다. 젓가락을 들어 맛난 반찬을...흐갸갸!

이러면서 알았어요.
명당이란 게, 그게, 참, 별거 아니구나!
이웃이 편해야 그게 명당이구나!

한참 명당자리에 취해서,
이동네, 저동네, 이마을 저마을, 이산 저산 뒤지고 돌아다닐 때였거덩요.

그래, 저렇게 좋은 자리 찾아댕기는 짓 당장 그만두고,
적당히 됐다 싶은 곳 정해서, 그게 여기 지금 사는 뎁니다, 바로 내려와 뻐렸어요.

이웃이 편해야 내가 편한 것이고, 내가 편한 곳이 명당이다.
받아들 적었는감유?
*******************

2001년

3월.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로 들어왔다.
무작정 귀농이라고나 할까...

8년쯤 전에 들어와 살고 있던 재욱이 형이 집도 빌려주시고 땅도 빌려주셨다.
드디어 집과 땅을 모두 갖췄다.
집도 화순에 있을 때에 비하면 완전 호텔이었다.

깻잎 농사를 지었고, 고추, 콩 등을 심었다.
논농사도 600평 정도 지었다.

그 해, 사람들은 1000년 만에 오는 가뭄이라고 입을 모았다.
무진장 고생했다.

다음 해부터 농사로 돈 만들기를 포기했다.
아직 농부 될 자질이 부족했다.

충북대 교수하다가 때려 치고 변산 내려가서 농사짓는 윤구병 선생은
일찌기 <철학과 현실 3호(1989)>에 짧은 자서전을 쓰면서
농부니 어부니 하는 족속들을, 자기가 중학교때부터 가출을 밥먹듯이 하면서 찾아 헤맸던
<성자>로 인식하게 된 얘기를 쓴 적이 있다.
쎄가 빠지게 일해서 좋은 것은 헐값에 남들 멕이고
지는 못 파는 거 찌시래기나 겨우 먹으면서도 헤벌레~ 하니, 성자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 때까지만 해도 힘이 남아돌아서
모가지에까지 힘이 들어가 빳빳이 고개 쳐들고 살던 내가,
어떻게 이런 한심한 무리에 끼어들 수 있었겠는가? 얼척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쨌거나 복슬이, 원이, 덕산이(우리집 강아지들) 덕분에
성질 급하게 뛰어나가지 못 하고 2004년까지 4년 동안 잘 곰삭았다.
텃밭 농사나 지으면서 이렇게저렇게 버텼다.

저 위에 써 놓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이런저런 책을 쓴 것도 이 시간 동안이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한 일도 있고, 길을 찾기 위해 한 일도 있다.

그러다가 도저히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만났다.
나를 위기에서 건져준 건 법륜스님이었다.

나는 <자유>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나는 <바람>이다.
자유를 빼 놓고 내 삶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학교 댕길 때 죽어라 공부한 것도,
대학 갈 때 문학이나 역사를 접고 철학을 택한 것도,
첫 직장으로 카피라이터를 택한 것도,
직장을 접고 시골로 내려온 것도,
그 외 기타 등등도...

그러나 <진정한 자유>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법륜스님을 통해 알게 된,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자유>, 즉 해탈이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
빤쓰(2003. 9)

오줌누러 밖에 나갔다 왔는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진짜 오랜만에 보는, 잔치.

하늘은 난리가 났다. 밤나무 음영 위로 별똥별이 휘~리릭 지나가고,
중간 하늘엔 은하수 흐르고,
동남방에 화성, 아직도 그 빛이 바래지 않았다.

형형하다는 말이 먼 말인지 알았다.

엊그제 엄마가 오셨다.
우리 엄마는 일흔 둘. 32년생이다.

내가 세탁기 돌려 빨아서 아침에 널어놨던 빨래를
저녁 먹고 모자가 안방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 나누며 갠다.
마누라는 공부가 있어, 서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엄마 : 빤쓰가 이게 뭐냐? 시커무티티해가지고! 쌂어서 깨깟허게 좀 입고 살어라.

나 : (꽤 심각하게 부른다)엄마!

엄마 : 왜~!

나 : 엄마, 나, 이 빤스때미 얼매나 고생혔는지 알어요?

엄마 : 먼 고생?

나 : 엄마 떨어져서 서울 올라와 보니, 누가 빤쓰 쌂어 주나?

이불도 그려.
누가 홑이불 깨깟허게 풀 맥여서
빳빳하고 개안허게 깔어 주나?

그렇다고 내가 헐줄을 알어?
아니믄 헐줄 안다고 혀도, 그걸 헐 시간이 있어?

다른 애들은 어떤 빤쓰 입어도 상관 없고,
다른 애들은 어떤 이불 깔고 덮어도 상관 없는디,
나는 그거, 안 삶아 빤 빤쓰 입기가 힘들다 이 말여.
이불 안 깨끗허믄, 잠도 잘 못자고.

그러니, 힘이 들으까, 안 들으까?
아~무지허게 힘들었슈!
으~~~첨에 그게 얼매나 힘들었는지 알어요?

엄마 : (좋아 해야 할지, 아니면 안쓰러워 해야할지 분간하기 힘들어서 어정쩡한 표정)......

나 : (너스레를 떨며)
긍게, 애들은 험허게 키우야요.
내가 그 뒤로 15년을 혼자서 살었잖유.
인자는
빤쓰 삶어 빨어서 뽀얗고 깨끗한 것 입어도 좋고,
대충 빨어서 시커무티티헌 것 입어도 좋고,
오래 안 빨어서 누르팅팅헌 것 입어도 좋고,
구멍 숭숭난 것 입어도 상관없고,
빤쓰 못 빨어서, 입을 놈 없으믄, 그냥 안 입어도 좋고...

인자 저 빤쓰가 나한테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는 거여요.
긍게, 나는 빤쓰한테서 자유롭지.
안 그려요?

빤쓰가 이렇든지 저렇든지 아무 문제가 안되잖아.
그러니,

요새 엄마들 애 키우는 거 보믄, 깝깝혀 죽겄슈!
나중에 무슨 원망을 들을라고들 저러는 건지...

엄마는 말없이 웃기만 하신다.
이 막내자식이, 말로는 어찌 안 되는 걸 울 엄마 잘 아시니까,
허고 싶은 말이 있어도 아마 속으로 허고 마셨을 거다.

그려, 니 말이 맞기는 맞는 말이다.
그런디, 그게, 애미 맘이 어디 그렇냐.
너도 애 낳고 키워바라. 이눔시캬!

*****

여기서 <빤쓰>는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 돈이나 명예, 권력, 건강, 집, 옷, 이념 등 어떤 것으로도 바꿔치기 할 수 있다.
<내가 의존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풀려 벗어나는 것, 이것이 해탈이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내 삶이 거의 거덜났을 때,
내가 추구해온 <자유>가 행복으로 나를 이끌지 못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을 때,
마침내 <진정한 자유>가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의식은 한 순간에 바뀔 수 있지만
생활은 그렇게 한꺼번에 바뀌지 않는다.
<그릇된 자유>로 35년을 살았으니, <진정한 자유>로 살아 볼려면 7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2005년,
나는 여기 화천군 간동면 용호리에 자리를 잡고, 그나마 농사, 짓는 것처럼 흉내는 내기 시작했다.

첫 농산물로 감자 수확을 앞두고 있다.
요즘 내게 땅 속 감자가 뜨거운 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