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검은 눈(黑雪), 팽덕회의 참전기-엽우몽 작

아하 2015. 11. 7. 20:15

"검은 눈"을 검은 비로 잘 못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팽덕회"가 쓴 회고록으로 알고 있었다.

팽덕회로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20년도 더 된 원고를 찾아 보았다.

"엽우몽"이 쓴 다큐 소설 "검은 눈"이었다.

다시 검색하니 "한국전쟁 총 3권"으로 나와 있다.  1권 검은 눈, 2권 한강의 피, 3권 검은 비.

팽덕회를 처음 만난 건 아마도 "중국의 붉은 별"에서 였을 것이고

얼마 후, 군산에서 방위 받고 있을 때, 진중문고 문고판으로 흑설을 읽었다.

당시 나는 정훈병이었다.

부대에 정훈장교가 없었고 나는 나이도 많았기 때문에 거의 장교급 대우를 받았다.

작전실에 근무했다. 작전 장교가 중령 승진을 위해 교육 받으러 가서 전화를 걸어왔다.

흑설, 충무공의 일기 등등을 불러주고 골라서 독후감 두 편을 써서 보내달라고 했다.

당시 작전장교는 싸다이 다운 면모가 있는 꽤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때 팽덕회를 만났다.

전쟁 미치광이 맥아더도 있었다.

모택동 큰아들이 전쟁에서 죽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 하고, 북한 땅에 묻혔다는 사실도 새로 알았다.

파로호.......

깰 파, 오랑캐 로.......

호수가 옛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게 했다.

마오는

"조선으로 간 인민들의 시신이 다 돌아오면, 그때 마오안잉의 시신도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다던가....

역사학자 한홍구 선생은 우리 권력자들 중에 이런 인간이 한 개라도 있느냐고 통탄했다.

책에서 오래 기억하는 대목은 "인해전술"에 관한 것이었다.

제1차 입조 부대는 팽덕회의 지휘아래 "보명 12개 사단, 포병 3개 사단인 약 26만명"이었다.

당시 연합군 규모와 큰 차이가 없었다(확인 필요).

인해전술은 심리전이었다.

아주 적은 부대를 칠 때, 어마어마한 거대한 군사력을 빠른 속도로 기동해서 포위 섬멸하는 것이다.

몇 차례 반복하면 꽹과리 소리만 들어도 적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인해전술의 실상은 뭐였냐면

"전선의 어느 부대는 연일 기아상태에 있었으며,

또 어느 부대는 맨발로, 병사들은 담요를 잘라 발을 감아 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였다.

그중에도 동부전선 제 9병단 상황은 최악의 상태로,

급히 서둘러 입조했기 때문에 부대는 동기장비로 교환을 하지 못 하고

병사들은 영하 20도, 30도의 강한 추위 속에서 얇은 옷에다가 배까지 굶주려 가며 참전했다.

추위와 기근에 의해 각군이 1만명 이상의 결원을 냈다.

적진에 돌격을 감행했을 때는 대개 일개 중대 백명 정도가

달려가는 도중에 소리도 없이 눈이 쌓인 땅 위에 넘어져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죽었다......"(343쪽)

이런 대목을 읽을 때 눈물이 날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어차피 집 떠나 전쟁에 끌려나온 어린 아이들이다.

엄마 보고 싶고 집이 그리웠을 것이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죽어갔을 것이다.

****

저 잡것들이 역사전쟁을 해보자고 덤빈다.

수세적으로 말고 공세적으로 제대로 한 판 해 보면 좋겠다.

민족반역자 인물전 1권 박정희 로 시작해서 100권까지 내는 걸로 응답하면 어떨까?

정말 한 판 하면 좋겠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화인민지원군의 총사령관인 팽덕회(펑더화이)


펑더화이(번체: 彭德懷, 간체: 彭德怀, 병음: Péng Déhuái, 팽덕회) (1898년 1월 24일 ~ 1974년 11월 29일)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이다. 중국 10대 원수 중의 한 사람이다.



생애

후난 성 출신으로, 어려서 양친을 잃고 9세때부터 노동에 종사하여 어린시절을 광부, 막노동으로 전전하였다. 16세에 탕셩즈 군벌의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후난군관강무당(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국민당군의 장교가 되었다. 이후 국민당군의 북벌에 참가하고, 1928년 2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공합작 결렬이후, 휘하 부대를 이끌고 후난 성 핑장에서 궐기하였다가 나중에 마오쩌둥과 주더의 해방구에 합류했다.


이후 홍군을 지휘하였고 장정 참가 뒤 옌안으로 이동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자 팔로군으로 항일전에 나서, 1940년 화북지역에서 100여개의 연대를 동원한 "백단대전"을 지휘했다. 이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고 팔로군도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항복 이후, 국공내전 시는 서북인민해방군(후에 제1야전군)을 맡아 1948년에는 국민당군에 함락되었던 옌안을 찾아, 이후 계속 서진하여 서부의 국민당군에 맞섰다.

한국전쟁[편집]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9월 15일 유엔군이 참전해 인천 상륙 작전으로 반격에 나서 10월 1일 삼팔선을 넘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련의 지원요청 하에, 마오쩌둥은 한반도 출병을 결정하였다. 이때, 린뱌오는 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령관을 못맡게 되자, 10월 8일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고 사령관에 임명되어 참전하였다. 그뒤, 중국인민지원군은 유엔군에 대한 군사행동에 나서 청천강 이남으로 유엔군을 후퇴시켰다. 유엔군의 정면 공습 진공을 피했다가 역습에 나서는 군사전략으로 작전이 성공을 계속하자, 마오쩌둥은 지원군의 피해상황과 물자빈곤을 알리며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는 펑더화이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한반도 남부까지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전선은 반격에 나선 연합군에 의해 38선 근처에서 교착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펑의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행정일을 담당하던 마오쩌둥의 큰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 1950년 11월 25일에 미군의 공습을 받고 숨졌다.

펑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있던 1952년 귀국하였고, 1954년 국무원 부총리겸 국방부장을 맡았다.




마오안잉과 그의 부인 류숭린

마오안잉(모안영, 중국어: 毛岸英 Máo Ànyīng[*], 1922년 10월 24일 ~ 1950년 11월 25일)은 마오쩌둥과 두 번째 부인 양카이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생애

마오안잉은 1922년 후난 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오쩌둥1927년 추수 봉기 이후에 도주하면서 가족과 헤어졌는데 마오안잉의 어머니 양카이휘는 1930년 국민당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후 마오안잉과 그의 동생은 국민당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도주했으며 그 곳에서 공산당 지하 조직의 보호를 받았다.

1936년 마오안잉은 파리로 건너가 다시 모스크바로 갔고 거기서 가명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들어가 동부전선에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10월 류숭린(劉松林)과 결혼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인민지원군이 결성되었고 마오안잉은 이 부대에 지원하여 펑더화이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펑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전사했다. 11월 24일 두대의 정찰기(P-61 Black Widows)가 떠서 중국군의 위치를 탐지하였으며, 다음 날 정오에 4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그 중 하나가 마오안잉이 있는 동굴 근처에 떨어져 사망을 하게 된 것이다.[1][2]

그의 유해는 평안북도 회창군 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혔다.

일화

마오안잉이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할 때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등은 마오쩌둥의 장남인 그의 참전을 처음에 꺼려하여 마오쩌둥에게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하며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다른 인민들도 자식을 전쟁에서 잃었을 것임을 생각하여 마오쩌둥 주석은 아들의 시신을 가져오지 않았고, 훗날 '지도자라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아들의 참전을 말리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 전사 소식을 마오쩌둥에게 직보하지 않고, 저우언라이에게만 보고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이 소식을 수뇌부 사이에서 공유하였으나 마오쩌둥에게는 당분간 알라지 않도록 하였다. 결국 마오안잉이 전사한 지 1개월도 넘은 1951년 1월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제3차 전역이 감행된 이후에야 마오쩌둥의 비서 예즈룽이 이 소식을 전하였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담배를 물고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