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귀농, 준비하는 시간을 즐기시라니깐요!

아하 2012. 5. 29. 20:26

[월간 전원생활 2006년 1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귀농,
준비하는 시간을 즐기시라니깐요!  


언젠가 ‘부부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려면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누가 써 놓은 걸 보고는, 그래 맞는 얘기다 싶어서, 바로 집사람한테 물어 봤습니다.

“나랑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냐?”

제 뜬금없는 질문에 우리 마누라는 피식 웃더니 가당찮다는 듯이 대꾸도 안 할 테세입니다. “아, 그러지 말고 좀 성실하게 답변을 하세요!”라고 불호령을 내리면서, 내가 왜 이런 훌륭한 질문을 하는지 그 심오한 배경에 대해서 열심히 나불나불 설명을 하니까 그제서야 마누라쟁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뗍니다.    

 

                  [귀농학교에서 현장 실습 오신 학생들]


“응, 그 때.”
“언제?”
“왜, 그 때, 홍천 갔을 때 있잖아.”
“홍천 갔을 때?”
“렌트카 빌려서 돌아다니다가 돈 떨어져가지고 고생고생해서 겨우 집에 돌아왔잖아.”
“으응, 그 때!”

언젠가 하면, 결혼한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제가 귀농하겠다고 정보를 모으고 답사하고 그럴 때입니다. 가진 돈은 얼마 안 되고, 모은 돈도 없는데 얼른 시골 내려가 살고 싶기는 하고, 뭐 어쩌겠습니까. 주로 ‘무료로 이거저거 해드립니다’라고 돼 있는 데로 눈이 가게 마련입니다.

‘전국귀농운동본부’라는 단체가 있고 여기서 발행하는 ‘귀농통문’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제가 시골 내려가 살겠다고 발버둥치기 시작할 당시에 3호까지 발간이 돼 있었는데, 구성이나 편집도 엉성한데다 그림, 사진 같은 거는 눈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잔잔한 글씨만 깨알같이 박혀있는 데다가 종이까지 시커무튀튀한 재생지를 쓰고 있는, 한마디로 시대에 엄청 뒤떨어진 한심한 책이었습니다. 다만 책 맨 뒤쪽에 ‘귀농복덕방’이라는 꼭지를 만들어서, 두어 페이지 남짓 땅이나 집, 매매나 임대 정보를 실어 놓았는데, 당시에 이건 정말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정보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 되지 않았고, ‘귀농’이라는 말도 익숙치 않던 때입니다. ‘귀곡산장’과 비슷한 어감을 풍기는 ‘귀농’이란 단어가 그리 탐탁치 않아서, 뭐 좀 좋은 다른 말 없나 궁리하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주말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기차 타고 가평까지 와서 차를 빌려 타고, 홍천 서석이란 데를 찾아 나섰지요. 야, 참 희한하데요. 차를 내려서 보니까 저 쪽으로 죽 늘어서 있는 높은 산봉우리가 발밑에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지형이 ‘동고서저’니 어쩌니 하는 말을 책에서만 봤는데, 이렇게 직접 맞닥뜨리니까 그냥 이해가 되는 겁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풍경입니다.

새로 지은 연수원 비슷한 건물을 관리하면서 농사 경험도 하라고, 생활비도 조금 보태드리겠으니 뜻이 있는 분은 얼른 오셔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시라는 친절한 광고를 귀농통문에 실어 놓은 곳이어서, 이야 잘 됐다 싶어가지고, 벌써 시골에 다 내려간 것인 양 혼자서 머리 속에 온갖 그림을 그리고, 내가 그린 그림에 맞춰 온갖 계획을 다 세워놓고, 흥분에 들떠서 내려간 것이었는데, 막상 가보니까 영 꽝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농사지을 땅도 없는 거예요. 그래 마땅찮아서 그냥 돌아오는데, 큰소리 떵떵 쳐댄 마누라 보기도 민망하고, 희망에 들떠서 세워 놓은 계획도 물거품이 됐으니 코가 석 자나 빠져가지고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먹을 거는 챙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파는 강원도 찰옥수수를 한 뭉텅이 사서 들었지요. 퍼런 망태기에 가득 담은 옥수수, 그거 꽤 무겁습니다. 미리 예약해 놓은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선 채로 서울까지 오는데 서두르느라 저녁도 못 먹어 배는 고프고, 주말이라 기차는 붐비고, 손에 든 옥수수 망태기는 무겁기만 하고, 기진맥진해서 밤늦게 청량리역에 내리니, 아뿔싸,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겁니다. 게다가 현금지급기 이용시간은 지나 버렸고….

“고생만 죽어라 했는데 좋긴 뭐가 좋냐?”
“그래도 재미있었잖아!”
“오호, 고생도 추억이 되는 것이로구만.”

그렇죠? 재미있습니다. 시골로 내려가 살겠다는 마음을 먹고 돌아다녀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내 살 곳은 어디인가?’라고 생각하고 눈을 부라리며 이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면, 이건 그냥 차타고 슥 스치면서 보던 나라가 아닌 겁니다. 유명한 글쟁이들이 써 놓은 것처럼 정말로 길가에 있는 돌멩이 하나까지 새롭게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게다가 처음 귀농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대게는 다 좋은 자연 속에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주로 오지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직 때 묻지 않은 자연에서 받는 감동은 훨씬 커지게 마련입니다. 굳이 귀농을 할 생각이 없는 분이라도 해 봄직한 일입니다.

발품을 많이 파는 건 좋은 일입니다. 당장은 돈과 시간이 많이 깨지기 때문에 아까운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좋은 추억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준비하는 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한 길게 잡는 게 좋습니다. 이때가 제일 좋을 때예요. 귀농하겠다고 얘기 나누러 찾아오시는 분들 보면 눈이 반짝반짝합니다. 새로운 희망과 설렘이 있어서 그렇지요. 얼마나 좋아요. 성급하게 결정을 내려서 즐거운 시간을 단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근데 정작 당사자는 그걸 잘 모른단 말씀이지요.

발품을 오래 파는 게 좋다고 얘기하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처음에는 ‘시골에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로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게 돼 있는데, 절대로 경치가 밥 먹여 주는 건 아니거든요. 처음에 시골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경치가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옮겨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려요. 호기롭게 덜컥 정해버리는 것보다 일정한 시간 동안 열심히 발품이나 팔고 다니는 게 남는 장사라는 말씀 되겠습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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