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들어나 봤나? 부역

아하 2012. 5. 29. 22:14

[월간 전원생활 2006년 4월에 쓴 글입니다]

들어나 봤나요? 부역(賦役)이라고!


시골로 내려와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동네 아저씨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어쩐 일로 우리집까지 다 찾아오셨어요?”
“응, 동곡 걷으러 왔어. 자네도 이제 동네 주민이 되고 했으니까 당연히 동곡을 내야지.”
“예? 동곡요?”
“응, 한 집당 두 말씩이여.”

도시에서 갓 내려온 신출내기는 응당 내는 거라니까 그냥 내기는 하지만 뭔가 찜찜합니다. 동곡이 뭔가 싶어서 사전을 찾아봐도 안 나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됩니다.

동곡뿐만 아니라 부역도 있습니다. 부역이란 국가나 공공 단체가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지우는 노역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 아, 용호리 이장입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은 마을 대청소가 있는 날이니까 아침밥들 잡수시는 대로 마을회관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나오셔서 마을청소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일하는 날이 있습니다. 빠지면 안 됩니다. 빠진다고 해서 법적인 제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두고두고 “부역도 안 나온 놈”이라는 욕을 얻어먹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역 나가서 일을 쎄 빠지게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역 나가서 땀을 흘리면 삼대가 망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서로 해 가면서 낄낄대고 그럭저럭 대충 일 해치우고 부녀회에서 준비한 음식 먹으면서 막걸리도 한 잔 걸치는 재미 난 자리입니다.

 

                                                           [우리동네 2004년 연말 대동회 모습입니다.]


시골생활과 도시생활이 가장 다른 점은 아마도 이런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보통 70호에서 100호 안팎으로 이루어진 행정구역 최소단위인 리(里)는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생활 공동체입니다.

리의 우두머리는 누구나 잘 아는 이장입니다. 마을 주민이 모두 참여하는 대동회에서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이장은 마을을 대표해서 행정기관과 여러 가지 행정적인 일을 협의합니다. 마을 도로 포장이라든지 마을 숙원 사업 시행 등 주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이장은 늘 욕을 얻어 먹습니다. “잘 해도 욕 먹고, 못 해도 욕 먹는 자리”가 바로 마을 이장입니다. 또한 이장은 마을 농가를 대표하는 영농회장으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는데, 이러한 역할을 존중해서 농협에서는 이사에 준하는 대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이장을 보좌하는 집행기구가 각 반의 반장입니다. 반장은 반상회에서 직접 선거로 선출하며 이장과 임기가 같습니다. 연말에 모든 주민으로부터 징수하는 동곡은 이장곡과 반장곡으로 나누는데, 이장이 한 말 반, 반장이 반말을 갖도록 합니다. 이장과 반장은 마을 주민을 위한 일종의 봉사직이기 때문에 마을 주민이 모두 이장과 반장의 노고를 인정하고 고생했다는 보답으로 동곡을 내는 것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동곡을 내지 않으면 마을 주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니 시골로 내려가서 누군가 집으로 찾아와 동곡 걷으러 왔다고 하면, 반갑게 맞아들이시고, 뭐라도 먹을 것도 대접해 드리고, 동곡도 기꺼이 납부하셔야 합니다.

이장을 도와 마을 대소사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새마을 지도자가 있습니다. 이장이 마을의 대통령, 반장이 장관이라면 국무총리쯤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마을지도자는 언제부터 어떤 목적으로 생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이장을 도와서 마을일을 하는 자리가 되어 있습니다. 새마을지도자는 이장이나 반장이 받는 동곡같은 것이 전혀 없고 유일하게 지명직입니다. 이장이 지명합니다.  

이장-새마을지도자-반장이 집행기구라면, 다른 한 편으로 마을 의결기구가 있습니다. 개발위원회의입니다. 각 반마다 반상회에서 한 명, 또는 두 명을 선출해서 마을 일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기구입니다. 이장이 독단적으로 마을일을 해나가는 것을 견제하고, 마을의 전반적인 여론을 수렴해서 마을 대소사를 논의하고 집행 방향을 결정합니다. 국회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만 재미있는 점은 이장이 개발위원회의의 의장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의결기구와 집행기구의 장을 겸하고 있는 이장이 시골 마을에서 갖는 권한은 정말 막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한 행정 서류를 떼거나 하는 일은 도시와 다를 바 없지만, 뭔가 민원의 성격을 가진 일을 처리할 때는 보통 반장, 이장을 거쳐서 면사무소 공무원과 협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면에서 해결이 안 되면 군으로 올라갑니다. 이러한 절차를 잘 모르고 도시에서처럼 면사무소나 군청을 찾아가서 직접 일을 처리하려 들면, 설령 일이 성사가 된다 하더라도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마을을 대표하는 이장을 무시한 처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귀농하시는 분들이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여러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고, 간혹 마을 주민과 마찰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럴 때 마을 이장님께 도움을 청하거나 중재를 요청하시면 한결 수월하게 일을 진행해 갈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흔히 대통령을 욕하고 헐뜯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통령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듯이 마을 주민들도 틈나는 대로 마을 이장을 욕하고 헐뜯기는 하지만 마을 일을 관장하는 대표로서 인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받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또한 시골 생활의 철칙이기도 합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이장님의 도움을 받았다 싶으면, 시골에 내려가 정착하느라 여러 가지로 힘들고 곤궁하다 하더라도 마을 잔치가 있을 때 무조건 돼지 한 마리는 내고 봐야 합니다. 마을 잔치를 책임지고 진행해야 하는 이장님의 위신을 높여주는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을 주민으로서 자기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도시 사람들이 시골 내려 와서 마을 잔치 있을 때 돼지 한 마리만 냈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흔히 말하는 텃새는 스스로 자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관행을 존중하고 기꺼이 그 속으로 스며들어가면 다 피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시골로 가면 시골 법을 따르는 것이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올 해 우리 마을 용호리의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저한테는 큰 자랑인데, 도무지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어서 좀 장황하게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