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귀농에 대한 오해

아하 2012. 5. 29. 22:07

[월간 전원생활 2006년 3월호에 쓴 글의 원판입니다]

2003.10.15
귀농에 대한 오해


형, 다들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 귀농한다고들 그러지요.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단순하고 소박하게.

근데, 살아보니까
영~꺼꿀로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시골살이는, 살아본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훨씬 더 복잡해진다는 말이지요.

가령, 포천 사시는 김선생님은,
모든 걸 제 손으로 해치우니, 얼마나 단순한 게, 삶이냐, 이런 말씀을 하시지만
우습게도 저 선생님 말씀보다는
모든 걸 돈으로 해치우니, 얼마나 단순한 삶이냐!
이게 더 설득력이 있단 말씀이지요.

그래서, 귀농이란 것이 실은
삶을 단순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복잡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집사람 친구 딸내미들이 놀러와서 마당에서 물놀이하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어른이 어떻게 쫓아갈 수 있겠습니까?]

삶은 원래 복잡한 것이다.
산다는 일은 원래 수없이 많은 활동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것이다.
이렇게 확장해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화 시키는 데 있는 거지요.
어릴 때, 하고 싶은 놀이며, 하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책을 보든지, 졸든지, 제발 가만히...

그러니까 툭하면, "귀찮타!"
이렇게 되지요.

울 엄마 올라오셔서, 일 하시는 거 보고 놀랬습니다.
잠시도 가만 계시질 않아요.
일흔도 넘은 엄마가 하시는 일이 어마어마 합니다.

삶의 대부분을 딱딱한 책상에 엉덩이 대고 앉아 있어야 하는 아이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광활한 생명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 합니다.
흐르지 못하고 꽉 막혀 있으니, 사고를 칩니다.
닭을 닭장에 빡빡하게 몰아 넣어 놓고
옴쭉달싹 못 하게 가두어 놓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전에, 박물관에서 원시인들이 만들어 썼다는
반월형 돌칼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혹당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원시인이라고 부르지만,
만일 몸에 걸친 옷 벗어 제끼고, 태어날 때의 그 모습으로
우리가 만난다면, 누가 원시인이고 누가 문명인인가?
한 번 물어볼만한 일입니다.

문명이 덜 발달하고, 삶의 조건이 척박한 나라일수록
그 나라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높고,
문명이 더 발달하고, 사는 게 단순하고, 편리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느끼는 행복지수가 낮은,
그 이해하기 힘든, 역설이,
대체 왜 생기는 것인지도 좀 심각하게 생각해볼 만한 문제입니다.

사실, 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간이 덜 행복해지는 까닭은
어쩌면 인간이 점점 더 종속적인 자리로, 덜 독립적인 자리로
자꾸만 나아가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 "가장 독립적이었을 저 원시인들은 가장 행복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그네들이 더 행복했을 거라고 누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 유전자 속에 내장돼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본원적인 즐거움,
살아있음 그 자체가 바로 즐거움 그 자체라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아마, 형도 느끼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고,
아무리 분통이 터지는 일이 있어도,
손에 호미 들고 밭고랑 매다 보면
느끼게 되는,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위안과 평화가 있지 않습니까?

망치 들고 톱 들고,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뚝딱거릴 때 느끼는 그 즐거움과 평화,
행복감, 이런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가령, 시금치 나물,
동네 슈퍼마켓이나 대형 할인점에 가서 돈 주고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요리해 먹거나
아니면, 아예 시금치 나물을 사다가 두고 먹으면, 간편합니다.
단순합니다.

이즈음, 쎄빠지게 삽질해서 씨뿌리고, 싹 나기 고대하고,
겨울 지나 봄이 되어서야, 제법 자란 시금치 하나하나 솎아다가
일일이 다듬어서, 씻고, 데쳐서, 꼭 짜가지고,
된장, 참기름, 깨소금, 다진 마늘 넣고
쪼물쪼물 무쳐 먹는, 고 맛있는 시금치 나물은,
땀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고, 도구까지 써야 하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일거리입니다.

어느 편이 더 맛나고, 즐겁겠습니까?
물론, 어느 편에도 더 큰 즐거움이나 더 큰 맛있음이
"객관적"으로 들어 있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행복감은, 저렇게 긴 과정을 두루 지내면서 하나하나 분명하게
그 과정을 보고, 느끼는, 느낄 수 있는 그 마음 자리 어디에,
그 느긋함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귀농이라는 것이 단순한 삶을 떠나 복잡한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란 걸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바로 '연장' 혹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철물점'을 제 집 드나들듯 하면서
마치 살림하기 좋아하는 아줌마들이 좋은 요리도구나 좋은 그릇만 있으면
가지고 싶어서 어쩔줄 몰라 하는 것처럼
"갖고 싶은"이라기 보다는 "정말 꼭 필요한" 연장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와는 별도로, 철물점이라는 데가, 정말 얼마나 광활한 대륙입니까?
신기한 별별 연장이 다 있지 않아요?
바로 이러한 연장들과의 만남, 즉,
광활한 저 물(物)과의 만남, 바로 이것이 귀농이다.
저는 이렇게 보는 겁니다.

자연에 맞딱뜨리는 거지요.
자연은 전혀 안 포근하잖아요.
거칠고 투박하고 지 멋대로고 조금도 내 맘을 헤아리지 않으니까,
게다가 천하무적이라서 누구도 당할 수가 없고 말이지요.

저 반월형돌칼을 쓰던 사람이나,
세련된 조선낫을 쓰는 나나, 자연 앞에서는 뭐 별반 차이가 없잖아요.

이거는 바꾸어 말하면, 어떤 근원적인 생명력,
자연 앞에 혼자 힘으로
그래, 뭐, 서 봤다는, 혹은 설 수 있다는 그런
바로 그 근원적인 생명력의 회복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의존할 것이라고는 자기 몸뚱이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
원시인들이 가졌음직한 어떤 그 근원적인 생명력의 부활이라고나 할까!

귀농하면 단순해질 거라는 생각을 얼른 버려야 합니다.
귀농하면 복잡해집니다.
생활도, 관계도 훨씬 복잡해 집니다.
삶은 원래 복잡한 것이고,
그 복잡함 속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게 귀농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 형!
제가 이 말을 왜 꺼냈느냐면 말이지요.
형이 한선생님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그래요.

한선생님이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훌륭한 분임이 틀림없지만
반드시 "어떤 측면에서는"이라는 단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저는 귀가 얇은 사람이라서
그동안에는 혹 했거든요!
야, 멋지다! 맞어맞어! 바로 저거야!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이랬거든요. 근데, 이제는 좀 덜 그래요.

개별개별의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진실 혹은 삶의 진리 또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나 '좋은 것'이 '옳은 것'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제법 날카롭게 직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털처럼 가볍게, 나무처럼 묵묵하게 "그냥 사는 것"이 사는 것
아니겠느냐는 형 말씀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밤이 늦었네요. 주절주절 길었습니다. 편안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