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시골 가면 뭐 하고 싶으세요?

아하 2012. 5. 29. 22:23

[전원생활 2006년 6월호에 쓴 글]

사진 : 간동면에 하나뿐이던 오음리 약국이 간판을 내렸다. 약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혼자 쓸쓸히 앉아 계신 모습이 마치 지금 시골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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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가면 뭐 하고 싶으세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화천군 간동면입니다. 구만리부터 간척리까지 열두 개 리(里)가 길게 늘어서서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그 중심에 오음리가 있습니다.

오음리에 약국이 하나 있었습니다. 면 단위에 약국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그런데 지난 겨울 약국을 지키시던 할아버지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약국집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고 몸이 불편하셨습니다. 손님이 약국 문 열고 들어가면 판매장과 연결된 안쪽 살림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시는데, 그 모습이 마치 느린 화면을 보는 듯 했습니다. 필요한 연고를 하나 건네받고 셈을 치르기까지 10분은 족히 걸려야 했지요. 저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지루했습니다.

할어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오음리 약국이 문을 닫았습니다. 동네 사시는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한테는 무척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제 간동면에는 약국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하다가 다쳐서 필요한 연고를 하나 사려면 26km를 달려서 화천 읍내로 나가든지 그보다 더 멀리 춘천까지 나가야 합니다.
간동면에는 없는 게 정말 많습니다. 영화관도 없고 한의원도 없고 치과도 없고 도시에서는 그렇게 흔한 PC방이나 영어 학원, 피아노 학원, 미술학원도 없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만화방도 물론 없고요. 저는 귀농하는 분들이 이런 부분을 채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면 어떤 분들은 이러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봐, 이봐, 그게 무슨 소리야? 시골에 내려가서까지 도시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하라고? 그럴 거면 뭐 하러 시골로 가겠어? 그냥 도시에 살고 말지.”

제가 여쭤보지요.
“그러면 시골 내려가서 뭘 하고 싶으세요?”

귀농학교를 다니신 분들은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합니다.

“농사를 져야지. 농사. 생명순환의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서 우리 가족 먹을 거리를 해결하고, 내가 살 집을 내 손으로 짓고, 내가 입을 옷도 내 손으로 지어 입으면, 의식주를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잖아. 자급자족이 된다 말이야.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의 이법에 맞춰 사는 거야. 세상 욕심 다 버리고 적게 벌어 적게 쓰면서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야지.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일세.”

딩동댕! 멋진 말씀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그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복잡하고 골치하픈 도시를 벗어나 월든 호수 근처에 통나무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결코 나쁜 생각이 아니지요. 훌륭한 전환입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세운 도시가 소멸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발전시킨 기계문명이 인간을 편하게 살도록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얼마 전에 귀농학교 관계자들이 모여서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제가 이런 정황을 장황하게 떠들고 나서 물었지요.  

“형님, 귀농하고 싶어 하는 분들의 상황이 이런데, 도시에서 하던 일을 시골에 내려와서도 그대로 해 달라는 말이 씨나 먹히겠습니까?”

전북 완주에 사는 전희식 형님이었을 겁니다.

“승우씨. 그렇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예를 들면 의사라고 해도 환자들이 의사를 장사꾼으로 봐 버립니다. 생명을 다루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의사에 대한 존중이나 고마움이 전혀 없습니다. 괜히 과잉진료해서 돈이나 더 뜯어내려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스트레스가 안 쌓이겠습니까?
사람은 돈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일을 하는 사회적 관계가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관계에서 일을 하느냐가 문제라는 겁니다.”

그림을 그려 봅니다. 내과 의사가 시골 내려와서 병원을 차려 놓고, 허구헌날 밭에 나가 감자밭 풀이나 매고 앉아 있습니다. 감자밭 풀을 두 시간만 매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데, 사흘 연짝으로 풀을 매려니 얼마나 허리가 아프겠습니까? 뭔가 핑계 거리가 있어야 좀 쉬겠는데, 찾는 사람도 없으니 그저 일이나 계속 해야 할 것 아니예요. 이 때 마침 배 아픈 환자가 전화를 합니다.

“의사 선생, 나 배 아파. 얼릉 좀 와줘.”

허리 아픈 의사 선생은 호미는 그냥 밭골에 던져버리고 신이 나서 달려갑니다. ‘허리 아파 죽겠는데 잘 됐다!’ 이러면서 말이지요. 남 배 아픈 게 뭐 잘 된 일이겠습니까마는 의사선생한테는 얼떨결에 잘 된 일이 되었습니다. “잘 됐다.” 이러잖습니까.

“승우씨. 시골로 내려가면 도시에서 하던 것과 똑 같은 일을 해도, 일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는 이걸 놓치지 않고 잘 봐야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평생 지어보지 않은 농사짓는다고 작년에 아주 생 고생을 했는데요, 지난 겨울에 동네 형님들이 우리집을 많이 들락거리셨습니다. 행정기관에 제출할 사업계획서를 좀 써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고 써드렸습니다. 겨울에 할 일도 없는데 잘 됐지요. 농사철에는 흐지부지되고 말지만 아이들 공부 좀 가르쳐달라는 부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요즘은 반대로 동네 형님들이 저를 많이 도와주십니다. 일꾼도 얻어주시고, 너른 밭 로타리도 쳐 주시고, 불러서 술도 한 잔 주시고. 고맙지요. 서로 고마운 거지요. 서로 고마워하면서 어울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싶은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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