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 2006년 8월호에 쓴 글] ** 벌써 10주년을 맞은 전국귀농본부. 전북 정읍에서 이사회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맨 왼쪽이 귀농운동본부를 창립하고 이끌어 오신 이병철 상임대표.
땅이 주는 위안과 평화 춘천으로 들어와 첫해에 주력했던 농사는 깻잎입니다. 얼음이 녹자마자 잎들깨 씨앗을 상토에 넣어 모를 키우고, 언 땅이 풀리면서 본밭에 퇴비 뿌리고, 갈고, 로타리 쳐서 어린 모를 심었습니다. 이제 슬슬 전문용어가 나오죠? 상토는 뭔가 하면 한문으로 쓰면 상토(床土)로 모판에 넣는 흙을 말합니다. 모판은 모를 길러내는 판이지요. 농사꾼이 농사를 지을 때, 논밭에 바로 씨앗을 뿌려서 재배하는 방법도 있고, 모를 미리 길러서 어느 정도 크면 밭에 옮겨 심는 방법도 있습니다. 모를 미리 길러 옮겨 심는 대표적인 작물이 바로 벼죠. 그래서 “모”나 “모내기” 하면 떠올리는 게 벼농사입니다. 벼농사에서 모를 키워 옮겨 심는 방법은 이미 조선시대에 널리 확산돼서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에 옮겨심기하는 대표작물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작물을 미리 상토에 씨앗을 뿌려서 어느 정도 크면 어린 모를 본밭에 옮겨 심습니다. 콩이나 옥수수도 요즘은 모를 키워 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여러 가지 잇점이 있기 때문인데요, 어떤 잇점이 있는가 하는 것은 차차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기로 하구요, 이렇게 옮겨 심는 걸 옮겨 심는다 해서 “이식(移植)”이라고도 하고, 자리를 제대로 정해서 심는다는 의미로 “정식(定植)”이라고도 합니다. 정식(定植)에 대칭되는 말은 “가식(假植)” 즉, 임시로 심는다 그런 말입니다. 모는 보통 비가림 하우스 안에서 키웁니다. 하우스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비가림 하우스, 시설하우스 이렇게 구분해서 부릅니다. 비가림 하우스는 말 그대로 그냥 비만 안 맞게 하는 용도로 만든 하우스고, 시설하우스는 난방장치가 돼 있는 하우스입니다. 사실은 그게 그거예요. 불을 때서 농사를 짓느냐 아니냐 그 차이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작물을 재배하는 하우스를 시설하우스라 그럽니다. 농사지을 때 최대 관건은 서리입니다. 언제 서리가 그치느냐, 언제 첫서리가 내리느냐, 요게 농사를 좌지우지합니다. 제가 사는 강원도 지역은 보통 5월 초까지 서리가 내리고, 10월 말이면 첫서리가 내립니다. 그러니까 농사 지을 수 있는 기간은 요 사이가 되는 거지요. 감자나 배추처럼 유독 추위에 강한 작물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물이 서리를 맞으면 동해를 입거나 심한 몸살을 앓기 때문에 서리를 피해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요즘 농사꾼들은 보통 비가림하우스 안에 가늘고 짧고 낭창낭창한 활대를 꽂아 작은 하우스를 하나 더 만들고, 여기에 비닐을 씌우고, 보온덮개를 덮고, 또 비닐 씌우고, 또 보온덮개를 덮어 어린 작물이 자라기에 적정한 온도를 맞춰가면서 모를 기릅니다. 이렇게 하면, 밭에 직접 씨를 뿌리는 것보다 수확시기를 훨씬 앞당길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동네에서 고추모를 보통 5월 10일을 전후해서 정식하게 되는데, 고추모는 2월 10일 경에 씨앗을 뿌려 키운 것입니다. 본밭에 바로 씨앗을 뿌려 솎아가며 키우던 옛날 농사꾼들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모한 일이었을 텐데, 요즘은 누구나 이렇게 농사를 짓습니다. “로타리 치는” 건 뭔가 하면 흙을 잘게 부수는 작업입니다. 로타리는 관리기, 경운기, 트렉터 등에 부착해서 쓰는데, 긴 막대기에 날을 달아서 빨리 돌리는 겁니다. 원리는 간단해요. 날이 달린 긴 막대기를 빠르게 돌리면 막대기에 붙여놓은 날이 막 돌아가면서 흙을 때려주니까 덩어리진 흙이 잘게 부숴지는 거죠. 이걸 로타리친다 그럽니다. 이른 봄에 트렉터가 붕붕거리고 다니는 건 대부분 로타리를 치고 있는 거라 보시면 됩니다. 로타리를 치면, 한참 신나게 올라오던 풀싹이 뿌리째 뽑혀 부숴져 버리고, 흙도 잘게 부숴지면서 작물이 들어가 살기 딱 좋은 푹신푹신한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제가 들깻잎 농사를 지은 것은 춘천, 화천, 홍천, 양구 등지에 사는 유기농사꾼들이 힘을 합쳐 만든 단체에서 저를 배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들깻잎은 비교적 재배가 쉽고 그럭저럭 돈도 좀 되는 괜찮은 농사기 때문에 초보자인 백승우가 하기에 좋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지요. 깻잎을 먹는 들깨씨가 따로 있다는 것도 저는 이 때 처음 알았습니다. 여기저기 견학도 다니면서 재배법을 익히고 시작을 했습니다. 잘 됐냐구요? 물론 잘 됐지요. 몇 백 년 만에 처음 있는 가뭄이라고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는데요 깻잎 농사는 잘 됐습니다. 왜냐하면 들깨는 생명력이 엄청나게 강해서 잘 될 수밖에 없거든요. 문제는 판매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주문을 받아서 깻잎을 따는데요, 30장을 따서 한 묶음으로 포장하면 보통 이것저것 다 제하고 생산자한테 570원 가량이 입금됐습니다. 깻잎 한 장에 20원 꼴이죠. 손님들이 오면 깻잎 따 들고 “이게 20원 짜리 수표다.” 이러면서 웃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들깨가 자라 오르면서 잎을 키우기 시작하는데, 처음에 따서 낼 게 없을 때는 주문이 많아요. 그러다가 점차 자라서 왕성하게 잎을 피워낼 때는 주문이 시원찮습니다. 또 그러다가 깻잎 뒷면에 노란 반점이 생기면서 생산량이 줄어들면 주문이 늘어납니다. 아주 웃기죠? 농사가 다 그래요. 깻잎은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계속 따 주지 않으면 금세 커다란 부채 만큼 커져버려요. 그러니 깻잎 출하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매일매일 계속 따 줘야 합니다. 미처 출하를 못 해 부채 만큼 커 버린 깻잎을 따 버리고 있자면 참 한심해요. 주문이 들어오면 비를 맞고도 따야 하고요,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는 딸 수가 없으니까 새벽에 따고, 저녁에 따고 그래야 합니다. 이때쯤 되면 모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말도 못합니다. 첫해 농사짓는다고 아주 의욕에 넘쳐서 등겨도 뿌리고, 우렁이도 집어넣은 논에서는 기대와 달리 풀이 마치 잔디밭 잔디처럼 빈틈없이 빽빽하게 자라 오르고, 가뭄에 시달리는 고추는 시들시들해서 영 맥을 못 추고, 하릴없이 맨날 출하도 못 하는 커다란 깻잎이나 따서 버리고 있자니,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런데도요 하여튼 하루 종일 이리뛰고 저리뛰며 실컷 일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어스름녘에 툇마루에 앉아 동산 위로 성큼성큼 고요하게 떠오르는 달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뿌듯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요. 또 마음 상한 일이 있어도 호미 들고 밭고랑에 들어가 앉아 흙 만지며 부지런히 일하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지는 경험을 계속 하게 되지요. 아! 그렇구나. 땅이 주는 위안과 평화가 있구나.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시들시들 메말라가는 건 땅을 밟지 않고, 흙을 만지지 않기 때문이구나…. 맞는 생각인지 틀린 생각인지 검증할 방법도 없고 그저 혼자서만 마치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고개 끄덕끄덕 하면서 호미질 계속 하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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