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너무 빨리 내닫거나 느리지도 않게

아하 2012. 5. 29. 22:32

[전원생활 2006년 7월 호에 쓴 글]

“너무 빨리 내닫거나 느리지도 않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남 화순에서, 시골 내려가면 꼭 해보고 싶었던, 거의 대부분의 일을 다 해보았습니다. 꿈같은 1년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제게는 아직도 농사지을 땅도, 집사람이랑 편안하게 지낼 집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문제, 예를 들면 함께 지내던 사람들과의 불화, 경제적인 곤궁, 안사람의 불평 등등 많은 문제가 겹쳐서 서울로 다시 올라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보니, 벤처 열풍이 온 도시를, 온 나라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였습니다. 한 몫 잡은 사람들은 졸부가 되어 있었고, 한 몫 못 잡은 사람들은 신세한탄을 하며 어떻게 해야 단단히 한 몫 잡을 것인지 암중모색 하고 있는 걸로 보였습니다. 마치 딴 나라에 온 것 같았습니다. 어리둥절한 가운데 누구한테도 절대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음… 온 나라가 미쳐 날뛰고 있구나!’

 

[농사 실습 오신 귀농학교 학생들]


세상이 그렇거나 말거나 저는 당장 일자리를 구해야 했습니다. 예전에 같이 회사 생활했던 분들 찾아가서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제가 그래도 상당히 꼼꼼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축에 들기 때문에 실무자들은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장님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몇 번이나 퇴짜를 맞았습니다. 이 분들은 일자리를 줘도 제가 5개월 밖에 못 버티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리란 걸 훤히 내다보신 것 아닌가 싶어요.  

무작정 귀농으로 한 번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5년 정도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정착할 곳을 찾고, 자주 내려가 보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땅도 구하고, 집도 구해서 농사짓고 살 준비를 다 한 후에, 짐 싸들고 내려가는 걸로 계획을 세웠지요. 그리고서 취직을 한 겁니다. 아주 어렵게 구한 직장이었어요. 그런데 5개월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나무를 캐다가 콘크리트 바닥에 세워놓은 것처럼 자꾸만 시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귀농을 하려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5년 정도는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이런 겁니다. 땅을 사는 것도 냉큼 사는 것보다 시간 여유를 좀 가지고, 한 마을에 꾸준히 오르내리면서 마을 사정을 잘 알게 되고, 마을 분들하고도 잘 알게 된 다음에, 사고자 하는 땅의 내력을 잘 알고 사라는 겁니다.

보통 시골은 대대손손 한 곳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작은 공동체입니다. 도시로 비유하자면 할아버지, 아버지, 나, 내 자식이 모두 한 직장을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더 올라가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다 한 직장에 다니는 셈입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총무과 김대리, 하면, 이 양반의 할아버지가 어느 부서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근무했고, 그 뒤에 아버지는 또 어느 부서에 있다가 어디로 옮겼고, 애는 몇인데, 큰 아들은 어느 부서에서 뭘 하고 있고, 둘째는 어느 지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완전 개차반이라더라, 뭐 이런 게 주루룩 다 나오는 거지요.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1163번지 하면, 그게 처음에는 누구 땅이었는데, 어떤어떤 사정이 있어서 누구한테 넘어갔고, 그러다가 어떻게 됐다는 식으로 땅에 얽힌 역사가 나오고, 그 땅 어느 구석에서 물이 많이 나서 영 몹쓸 땅이라든지, 돌이 많아서 글렀다든지, 질흙이라서 가뭄 잘 타고 물이 안 빠져서 농사짓기 힘들다든지, 적어도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분들은 땅의 이력과 땅이 가진 특징을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부동산 투자가 아니고 그 마을에 정착해서 살고자 한다면, 될 수 있는 한 좋은 땅을 구해야 합니다. 농사기술도 일천하고 농사 장비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땅이라도 좋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지, 땅까지 나빠 가지고는 견딜 재간이 없어요. 사는 게 아니고 빌려서 짓는 경우라도, 도지 많이 달라고 하는 좋은 땅을 얻어 지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아예 짐 싸서 내려가기 전에, 땅을 구입하기 전에, 한 마을을 정해놓고 진득하게 다니면서, 땅도 조금이라도 얻어서 직접 지어보고 말이죠, 페트병에 오줌 모아다가 키우는 작물에 줘 보기도 하고, 작물이 자라는 특성도 살피면서 이집 저집 다니면서 밥도 좀 얻어먹어 보고, 이렇게 하면서 마을 분들과 친해지는 거지요. 1년차에 일주일에 하루 내려갔다면, 2년차에는 일주일에 이틀 가고, 3년차에는 일주일에 사흘 가는 식으로 조금씩조금씩 시골 내려가는 비중을 키워가는 거지요. 너무 빨리 내닫지도 말고, 또 너무 느리지도 않게 차근차근 준비하면 고생도 덜 하고 정착도 쉬울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생활수준을 낮추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시골은 돈이 무척 귀합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어디 돈 나올 구멍이 없어요. 그러니 아껴 쓰는 연습도 미리미리 하면서 몸에 익히는 거지요. <녹색평론> 발간하시는 김종철 선생님 같은 분은 ‘자발적 가난’을 말씀하시지만 시골로 내려오면 그냥 ‘저절로 가난’해 집니다.  

얘기가 다른 데로 흘렀습니다만, 저는 5년을 계획했는데 겨우 5개월 직장생활하고 접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마 느긋하게 준비를 했을 텐데, 아직 젊고 어리숙한데다가 성격까지 급해 놓으니, 누구도 못 말리는 똥고집이어서 다시 한 번 무작정 귀농을 결행하게 됩니다. 2001년 3월에, 집사람은 떼어 놓고 혼자서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 새낭골이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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