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 2006년 9월호에 쓴 글]
풀, 지구를 지키는 전사(戰士)!
농사짓는 귀농이라면 마땅히 풀에 대해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들 하는데요, 이게 상당히 뻥이라는 걸 주말농장이라도 해 본 분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그저 콩을 심어도 풀이 나고 팥을 심어도 풀이 납니다. 냅두면 풀밭이 되지 절대 콩밭이나 팥밭이 되지 않습니다.
풀은 정말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위대한 생명체입니다. 농사를 지어보면 인류가 발전시켜온 문명이라는 게 풀을 극복하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입니다.
풀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잘 자라는지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 유월에 잠시 방심하면 유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우기(雨期) 동안 풀은 쑥쑥 자라 올라 금세 온 밭을 차지해버립니다. “네 처음은 비록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말씀은 틀림없이 풀에서 얻은 직관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풀은 줄기가 잘려도 곧바로 잘린 자리에서 새 순을 밀어 올립니다. 심지어 뿌리가 뽑혀도 물기만 있으면 다시 흙을 붙들고 살아납니다. 쉽게 죽지 않아요. 서양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괴물 중에 머리를 아무리 잘라도 다시 머리를 들이미는 메두사 같은 존재도 그 상상력의 밑바닥에 풀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풀은 종류가 수없이 많지만 풀 중의 풀, 모든 풀들의 왕은 단언컨대, <바랭이>입니다. 바래기, 바라고, 바라구 등 지역마다 조금씩 이름을 달리하지만 가장 흔하고 가장 억세며 가장 생명력이 강해서 모든 농사꾼들을 괴롭히는 풀이 바랭이입니다.
[풀과의 공생을 시도했던 내 농사...3년 동안 진행한 이 실험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돈이 안 돼서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베적삼을 흠뻑 적시며 콩밭 매는 아낙네가 매던 풀도 바로 바랭이일 겁니다. 바랭이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모양인데요 벼처럼 포기벌기를 하며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놈과 가느다랗게 마디마디 뿌리를 내리며 쫙 펼쳐지면서 넝쿨 풀처럼 작물 위로 올라타고 깔아뭉개는 놈, 이 두 종류가 대표선수입니다.
둘 다 무시무시합니다. 이 녀석들이 일단 뿌리를 잡으면 제거할 방법이 없습니다.
풀과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농사꾼들은 풀이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엥? 풀이 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정말입니다. 농사꾼들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 사래 긴 밭을 매다가 뒤돌아보면 매고 지나온 자리에 벌써 새 풀이 올라와요. 올라오면서 풀이 그런답니다. “야~! 머리에 수건 둘러쓴 년 지나갔다, 나가자!” 이러면서 막 밀고 올라온다는 거예요. 김매는 일은 보통 여성들이 담당하기 때문에 이런 소리가 나왔을 겁니다.
제초제나 농약을 쓰지 않고 비교적 옛날 농사에 근접한 소위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보면 풀은, 인간에게 가혹할 정도로 공격적입니다. 풀과 싸우지 않고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보려고 해도 풀은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욕심 사나운 아이처럼 모든 걸 다 차지하려 듭니다.
곰곰이 생각하게 되지요. 왜 풀은 인간에게 이토록 적대적인가? 왜 인간과의 공존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일까? 왜 그런가? 대체 왜 그런가? 풀과 싸우는 시간이 하도 많으니 여러 공상이 날개를 폅니다. 풀이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내가 없으면 좋겠니?」 「물론이지!」 「바보로구나.」 「뭣이?」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 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니?」 「한 번만 생각했겠어? 맨날 생각하고 맨날 바라는 게 바로 그거다. 정말 너희들만 없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농사짓기가 얼마나 수월 하겠니! 그야말로 천하태평이지.」
한심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뗍니다.
「지구상에 풀 없는 땅이 딱 두 군데가 있다. 사막과 도시. 도시는 너희들 인간이 우리를 물리쳐 이긴 곳.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쌓은 너희들의 성(城)이다. 그러나 만일 모든 것을 공급받는 혈관(길)이 끊어진다면, 도시는 그대로 사막이다.」
「도시가 사막이라구?」
「그래도 모르겠니? 우리는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지키는 전사(戰士)! 우리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다. 인간? 한낱 지구를 좀먹는 병균에 불과한 것.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너희와 싸운다.」
「인간이 병균이라고?」
「지구가 아프다. 열이 나고, 참을 수 없어 기침도 해댄다. 인간이다. 지구를 좀먹는 병균은 바로 너희들 인간! 암세포가 그러듯이 너희는 끊임없이 번식하며 지구를 갉아먹고 있다. 우리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을 뿐. 온갖 중장비와 화학물질로 무장하고 메뚜기떼보다 더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모든 걸 먹어치우는 너희는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다. 네가 나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백만 배 천만 배 우리는 너희가 두렵다.」
「쳇, 영화 메트릭스를 보는 것 같군. 시시껄렁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그만 사라져라, 풀의 영(靈)이여!」
사라져, 사라져를 외치며 신나게 호미질을 하는 나를 보고,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하십니다.
「거, 일 좀 하나 싶더니만 아주 맛이 갔구나. 맛이 갔어. 젊은 사람이 아깝게 됐구만. 쯔쯔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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