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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대기 협동조합을 만나다-2. 원주

아하 2012. 5. 29. 23:52

 

원주, 협동운동의 깊은 속살을 얼핏 보았습니다

백승우(화천 농부)


1. 

오늘날로 이어지는 원주협동조합운동의 뿌리는 1966년 11월 원동성당에서 신자들 35명과 출자금 64,190원으로 창립된 원주신용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왜 이때 이 땅에 협동조합, 그것도 하필 신용협동조합이었을까요?

전반적이고 광범위한 가난이었을 거예요. 지금 같은 상대적인 가난도 아니고, 너도 가난하고 나도 가난하고, 너도 먹을 것이 없고 나도 먹을 것이 없는 이러한 보편적인 가난. 이 지긋지긋한 가난이 힘을 쓰는 거는, 사회적인 안전망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목돈이 필요한데 돈을 융통할 수 없으니까 빚을 지게 되고, 한 번 빚더미에 깔리면 너무나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 해 허리가 휘고, 웬만해서는 이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이런 상황입니다. 1932년생인 우리 엄마 진술에 따르면 옛날에 장리니, 곱장리니 이런 게 있었다고 하는데요, 직접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그 당시는 쌀이 금 같으고, 비료 한 푸대 살라믄 쌀 한 가마니 줘야 되고 그런 때였응게. 초여름에 보리 한 가마니 갖다 먹으믄 쌀 한 가마니 줘야 되고, 봄에 쌀 한 가마니 갖다 먹으면 쌀 두 가마니 갖다 줘야 되고 그렸어. 이렇게 하나 갖다 먹고 두개 갖다주는 걸 곱장리라고 그러고, 하나 반 갖다주는 걸 장리라고 허고 그렸다. 곱장리 내먹고, 장리 내먹고 그렇게들 살었지. 그런게, 쎄빠지게 농사져서 넘 좋은 일만 식이고 살은거여.

 또 농사 지어 주기로 허고 고지내서 먹고도 살고. 고지내먹는다는 말이 먼 말인지 너 아냐? 논 한 배미(1,200평) 모내주고, 지심 매주고, 나락 벼주는 것까지 혀주기로 허고 쌀 대두 서말 갖다 먹는 건디, 이걸 ‘고지먹는다’고 그렸니라. 논일을 달싹 다 혀주는 건디, 등짐지는 건 안 혀줬다. 등짐 지는 건 원체 힘든 일이라 품삯도 더 쳐주는 것인디, 보통 품삯보다 배반이나 쳐주고 그렸으니까.1)


제 고향, 너른 김제 평야에 논마지기나 가지고 있던 우리 집도 홍수가 나서인지 가뭄이 들어서인지 정확하진 않은데 하여튼 도무지 먹고 살 방법이 없어져서 멀쩡한 전답 버려두고 온 식구가 서울 올라가서 청계천변에 거적대기로 집 지어 살며 빌어먹은 적도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신용협동조합, 소위 신협은 지금은 전국각지에 널려 있는 제2금융권일 뿐이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협을 통해 농사꾼들 집안 장판 밑에 혹은 항아리 속에 혹은 장롱 구석에 들어가 죽은 채로 엎드려 있던 쌈짓돈이 꾸역꾸역 모여 들어서 순수민간자본이 되고, 이 돈이 급전이 필요한 조합원들에게 목돈으로 나갔다가 푼돈으로 나뉘어 돌아옵니다. 대출해주고 이윤을 빼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위한 대출, 소위 ‘인격대출’이란 이름이 붙습니다.

나한테 빌려주는 이 돈이라는 물건이, 내 이웃 누가 누가 누가 누가 그 먹고 살기 어렵고 힘든 가운데 한푼 두푼 내놓아 만들어졌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반드시 갚는 거예요. 내가 이 돈을 꼭 갚아야, 또 갑자기 나처럼 정말 꼭 돈이 필요한 사람이 다시 돌려 쓸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갚는 겁니다. 연체 이자가 무서워서 혹은 채권 추심에 걸릴까봐, 신용불량자가 될까봐 갚는 것하고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지 않나요? 


2.

당시 가난한 정도가 전국이 다 비슷비슷한 상황이었을 텐데, 왜 하필 원주냐? 또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죠. 원주에는 지학순주교(1921~1993)와 무위당 장일순선생(1928~1994)이 있었다, 이렇게 대답해 볼 수 있어요.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어떤 일의 시작을 권하고, 모르는 걸 물으면 알려주고, 잘 못 가면 바로 잡아 주고, 힘들 때 격려해주고, 지쳤을 때 안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일이 돼 가는 것 아니겠어요?

지학순과 무위당 두 분은 1965년 원주교구가 설립되고 지학순 주교님이 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만나게 되는데, 1960년 부산에서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시작한 신협운동이 원주로 확장돼온 것으로 보면 될 듯싶습니다. 당시에 신협을 설립한 정신이 “고리채로부터 농민과 소상인을 보호하자”였던 것을 보면, 자율적 결사체라기보다 사회 구호활동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문막신협, 단구신협, 주문진신협, 영월에 삼옥신협 등이 설립 되고, 1969년 협동조합연구소가 세워지는데요 설립 취지는 “만민이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취지문만 봐도 협동조합정신이 더 깊어진 걸 느낄 수 있습니다.

1972년은 원주협동조합운동에서 꼭 기억해야 할 해입니다. 하나는 나라에 신협법이 제정되어 원주신협(지금의 원주밝음신협)이 세워집니다. 성당이라고 하는 온실에서 나와 이제 지역 사회라고 하는 넓은 밭으로 신협이 자리를 옮겨 잡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구요, 또 하나는 남한강유역에 집중폭우가 내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원주교구의 요청으로 서독과 카톨릭교단에서 재해복구를 위해 약 3억 6천만원의 지원금을 보내주었고, 이를 재원으로 재해복구사업을 벌이게 됩니다. 요즘도 집중 폭우가 자주 내리고 재해복구도 자주 하는데요, 일반적인 그림은 정부가 사업비를 산정하고 업체를 선정하면 업체는 포크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해서 무너진 다리나 길을 복구하고 나면 그만입니다. 만일 이때 재해복구 사업이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면 아마도 협동조합의 도시 원주는 없었을 것 같아요. 일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단순한 구휼사업이 아니라 마을 단위의 공동체 운동과 자립, 협동조합운동을 병행한 것입니다.

해당지역 관청의 관리와 교육, 언론, 종교계 대표 등이 참여하는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고, 단순한 재해복구가 아닌 “지역사회개발사업”으로 사업의 성격을 정합니다. 여기에 협동조합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협동조합운동가들이 결합하고, 김영주, 김지하, 이우재, 김병태, 정인재, 박재일, 이경국, 박양혁, 홍고광, 장상순 등 수십명의 젊은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이 원주로 달려와 결합합니다.

마을 단위로 공부하고, 조직하고, 함께 일해서 소득을 올리는 사업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을 텐데요, 가장 성과가 좋은 사업은 한우지원사업이었다고 해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 사는 아주머니 말씀에 따르면 소 두 마리 먹이고 감자 고구마 농사 천 평만 지으면 애들 셋 가르치고 먹고 사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고 해요. 소가 꼬박꼬박 새끼 낳아 주니까 소 먹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소득 면에서는 최고였다는 거지요.

마을에서 소 없는 집에 송아지를 한 마리 지원하되, 공짜가 아니고 이 송아지가 커서 새끼를 낳으면 돌려받아 다른 집에 다시 넣어주는 사업을 벌인 겁니다. 지금처럼 사료를 먹여 키우는 게 아니고 꼴 베다가 먹이고 풀 나면 내다가 매 먹이고 겨울에는 농사 부산물로 쇠죽 끓여 먹이니까 소 키우는 데 크게 돈 들어갈 게 없어요. 당시 소는 그냥 소가 아니고 황금알 낳는 거위나 다름이 없었을 것인데, 거저나 다름없이 집집마다 소가 생기니 얼마나들 좋았겠어요? 이렇게 소 입식을 매개로 작목반을 구성해서 마을공동체운동으로 나가는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지요. 1985년(사업이 공식 마무리 된 해는 1993년)까지 전개된 이와 같은 개발사업을 통해서 농촌과 광산촌에 167개의 협동조직과 74개의 신협이 건설되었다고 하니 이때의 마을 사업이 얼마나 열렬한 인민들의 호응 속에 펼쳐진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어요.  

다른 한 편으로, 거의 자급자족에도 미치지 못 하는 상태였던 시골 마을이 경제 성장과 함께 구매력이 생기게 되면서, 생필품의 범위가 늘어나고 도시 공산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납니다. 1980년부터 이런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소비조합운동이 본격화합니다.

그러나 농촌과 광산촌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와 같은 협동조합운동은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도전에 직면합니다. 1977년 수출 100억불 달성으로 상징되는 산업화와 도시화입니다. 도시는 농사꾼을 무섭게 빨아들여 도시 노동자로 만들고, 광산은 문을 닫습니다. 광부도 농사꾼도 다 떠난 텅 빈 마을에 자립 자율 자치의 협동운동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져 힘든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가난은 사라졌지만, 모내기하다가 목마르면 저만치 가서 논바닥에 고여 있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또 일하던 풍경도 함께 사라져버린 겁니다. 농촌 공동화, 농약과 비료 제초제의 만연, 산업공해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한편으로 7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가장 앞자리에 서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협동에 기초한 지역개발사업에 몰두하던 원주 사람들은 운동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오랜 동안 내재해 있었던 생명사상이라고 하는 씨앗이 당시의 이와 같은 시대적인 상황을 만나 발아한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합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른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로 표상되는 무위당 선생에게서 비롯한 생명사상은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원주 협동조합 운동으로 시야를 좁히면, 맨 먼저 80년대 초반 계속된 학습과 수차례에 걸친 일본 견학 등을 토대로 1985년 원주소비자협동조합(현재 원주한살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외화됩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농약, 제초제, 화학비료 따위를 쓰지 않고 고된 농업 노동을 감수하는 농민의 희생과 이를 비싼 값에 소비해주는 도시 소비자의 희생이 만나 비로소 서로 함께 살아나는 새로운 협동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3.

현재 원주 협동조합운동가들이 활동비(임금)를 받는 사람이 대략 430명(무급 자원 활동가 300여명)쯤 되는데 나이를 보면 20~30대가 대부분이고, 40대가 스무 명이 채 안 된다고 하고요, 올해 딱 50세 되는 분이 김용우님입니다. 원주 활동가들의 맏형 격입니다. 원주 호저생협을 일궈내셨고, 지금은 원주시 부론면 생명평화 한알학교 선생님으로 계십니다. 만나서 궁금한 걸 이거저거 여쭤봤어요.

찬찬히 살펴보면 원주 어른들한테서 넘겨받은 유산은 밝음신협하고 원주한살림생협 둘 정도인 것 같고요, 89년 호저생협(현 원주생협)을 빼고 나면, 원주 협동체(협동조합, 비영리 기업, 사회적기업 등을 두루 묶어 이하 이렇게 부름)들은 거의 다 2000년대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들인데요, 어째서 이런 긴 공백이 생긴 건가요?

“사람이 없었어. 세 가지로 보면 되는데, 82년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터지고 이 사건의 배후였던 원주는 아주 쑥대밭이 돼서 다시 일어서는데 시간이 걸렸던 거고, 학생운동하던 사람들이 원주로 돌아오지 않았어. 원주에는 연세대 원주캠퍼스가 있었지만 의대뿐이었으니까 원주 안에서 새로운 활동가가 배출되지 않았다는 게 있고, 선배 활동가들은 생명운동으로 돌아섰는데 후배들은 반독재 투쟁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도 있었고, 그래.

내 위로 바로 김영주 선생님(무위당만인회 회장) 이나 정인재 선생님이야. 정인재 선생님이 며칠 전에 칠순이셨는데 그 아래로 바로 나거든. 20년 차이야. 1세대 운동가들은 대부분 원주로 오셨다가 다 떠났고. 우리 세대는 다들 서울로 몰려 나갔지. 나는 지역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거고. 2008년~10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원주로 다시 몰려 들어오는 체제로 전환된 거야. 그러니까 협동조합운동도 어떻게 사람을 기를 거냐? 어떻게 활동가를 배출할 거냐? 이게 중심이어야 해. 사람이 모이면 사업에 필요한 돈은 따라 오거든. 사람이 중심이야. 

그리고 무위당 선생님이 94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면서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셔서 기일에 모여서 술만 먹었어. 7주기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대중행사로 치루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세미나를 시작한 거야.” 

IMF를 거치고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 원주사회에서 불편한 관계가 생겼다고 해요. 같은 활동을 하는 원주한살림과 원주생협 사이에 심리적인 경쟁관계가 형성된 것이죠. 이것 참, 큰 일 난 거죠. “원주협동운동의 뿌리를 복원하고자” 2001년 정인재선생님과 함께 김용우 선생이 나서서 일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지역 활동가들이 두루 참석하는 공부모임을 열고, 꼬박꼬박 뒷풀이를 하며 쌓은 성과를 바탕으로 2002년 원주의료생협이 태어납니다. 의료생협은 “원주협동운동의 상징”이라고 하십니다. 제가 물어봤지요. 왜 의료생협이었어요? 당시 의료문제가 상당히 심각했고, 아는 좋은 의사 친구들이 있어서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지만 쓰신 글을 보면 원주협동조합운동의 핵심으로 건강을 놓으셨던 듯해요. 볼까요.

“의료생협은 지역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해서 지역사회의 환경과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함께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때 의료생협의 진정한 목적인 건강한 사회와 삶이 이루어진다. 특히 건강한 ‘삶의 양식’을 만드는 것은 건강을 매개로 한 다양한 영역의 다양한 공동체운동과 만나야 보다 풍부해지고 본래 목적이 이루어진다.”2)

의료생협의 의료행위는 치료가 아닌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건강은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까지 원주에 나타난 여러 운동체들이 모여 장시간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이루어낸 성과가 의료생협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원주라는 테두리에서 이루어진 모든 협동운동의 성과가 흘러드는 모태가 ‘생명’이라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새로 일어날 협동체 운동역시 ‘생명’을 바탕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원주한살림, 원주생협, 원주밝음신협이 기관 출자를 하고 조합원들이 개인 출자를 해서 이렇게 의료협동조합을 만들고, 이어서 다음 해인 2003년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나중에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로 이름을 바꾸는데,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독립된 기관이므로, 여기에 속한 낱낱의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 비영리 단체들을 묶어 지칭하는 말로 협동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합니다)가 구성됩니다.

김용우선생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장주의를 버리고 다원주의를 택했어. 내가 크는 게 중요한데, 내가 크는 방법으로 친구를 키우는 길을 택한 거야. 혼자서 위로 크는 게 아니고 서로 손잡고 옆으로 커 나가는 거지. 그리고 지향을 원주라고 하는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두었고. 그러니까 원주한살림 원주생협 이렇게 각각으로 봤을 때는 개체지만 원주푸드라고 하는 큰 틀로 보면 한 가지 일을 둘이 나눠서 하는 게 되거든. 혼자 외롭게 하는 것보다 둘이 힘을 합쳐 함께 하는 게 더 좋잖아. 경쟁이나 질시를 넘어서 소통과 교류로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는 길을 닦은 거지.”

그렇게 닦인 길 위에 속속 들어선 협동체는 아래 표를 참조하시면 될 듯합니다.

 

조직명

창립연도

주요활동

원주밝음신용협동조합

1972년

조합원 약 1만6천700명, 자산 830억(2009년 12월31일 현재), 자본금 47억 원, 지역사회 공헌 사업 및 서민경제 버팀목

원주생활협동조합

1989년 

소비자와 농민이 함께하는 생활협동조합. 친환경농산물 생산 및 유통을 통한 생활공동체 지향. 조합원 생산자조합원 200명, 소비자조합원 1천200명(2009년말), 총사업규모(2009년) 21억7천여만원

원주한살림생활협동조합

1985년

조합원 5천400여명(2009년 말). 공급액 32억2천500여만원(2009년 말), 친환경농산물 소비를 통한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과 함께 지역살림을 위해 노력

남한강 삼도생활협동조합

2003년

조합원수 130명(2009년 12말). 삼도(강원도, 경기도, 충청북도) 접경지역인 부론지역의 농민과 소비자를 중심으로 생명농산물 직거래 활동

원주의료생활협동조합

2002년

조합원수 1천680명(2009년 말), 매출 12억1천여만원(2009년 말), 출자 7단체(2004년 말). 의료의 본질적 가치인 건강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하여 노력

성공회 원주나눔의 집

1999년

후원회원 200명(2009년 말). 지역사회의 안전망 구축 및 사회적 일자리 창출

원주자활센터

2001년

64명의 자활근로사업단, 10명의 자활공동체에서 기초생활수급자 및 차상위 계층을 고용

원주공동육아협동조합 소꿉마당

1999년

25가구(2009년 12월). 학부모인 조합원들이 출자금을 내 터전을 만들고 함께 운영하는 교육자치 공간. 보육과 교육

원주가농영농조합법인

1976년 

가톨릭농민회강원지구연합회로 출범. 출자회원 88명, 조합원 250명(2009년 12월). 친환경농산물 생산 및 유통

원주노인생활협동조합

2005년

조합원 1천100여명(2009년 12월), 활기찬 노후 생활 영위와 노인 일자리 창출위한 사업 전개, 깨끗한 학교 만들기, 택배사업, 소독방역사업, 식당 운영 등의 사업을 펼치고 있음

상지대학교생활협동조합

2005년

조합원 3천200여명, 학생, 교직원, 교수를 조합원으로 해 조합원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 및 서비스의 공급과 구매 사업, 조합원의 조합 사업에 대한 지식 향상을 도모하는 교육사업과 조합원 및 일반 대학인에 대한 홍보사업 등을 펼침

참꽃어린이교육협동조합

2005년

조합원 13가구, 대안교육기관 - 자녀가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며 생명을 일깨우며 살아가기 위한 환경 및 양육·교육 내용을 공유·창출하는 활동

문화소비자생활협동조합

2007년

조합원 350명, 서로 돕는 협동정신을 바탕으로 조합원의 복지향상과 지역사회 문화의 발전에 기여, ‘생활이 문화, 문화가 생활’ 사업 추진 및 미품(美品)을 통한 매장 추진

갈거리사랑촌

1991년

91년 갈거리사랑촌 개원, 97년 12월 십시일반 개원, 98년 원주노숙인센터 건립, 2004년 9월 갈거리협동조합 창립, 지역 복지사회 구현

(주)살림농산

2008년

87년 원주 한살림 참·들기름 공장 축성, 2008년 6월 원주 한살림에서 (주)살림농산으로 법인 분리


‘원주 주의자들’이란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친 건, 원주협동체가 원주의 식량자급율을 조사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입니다. 2005년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을 시작해 2008년 친환경급식지원센터를 열어 운영하면서 이룬 일정한 성과를 바탕으로, 지역식량체계 구축과 원주푸드종합센터 설립을 위해 2009년 말에 제정된 ‘원주푸드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연구 조사를 수행하는데요, 칼로리를 기준으로 서른두 가지 품목에 대해 원주의 식량자급율을 조사했는 겁니다. 전체 식량자급율이 50%, 쌀이 80%, 복숭아 500% 이런 식이예요. 원주사람들 먹기에도 부족한 쌀을 왜 비싼 돈 들여서 브랜드 붙여서 바깥에다 파느라 고생하느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어요.

원주푸드는 아직도 진행형이므로 운동이 시작해서 일정한 성과가 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염두에 두면서, 물 흐르듯 이어지는 김용우 선생님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면, “원주의 1년 총생산은 약 2조원이고 우리 협동체는 그 3% 정도, 6백억 정도 되거든. 앞으로 10년 동안 30%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게 목표야. 지금 우리 협동체 고용이 430명 정도인데 적어도 2천 명 정도는 돼야 블록을 쌓아서 외부에서 오는 영향을 막아낼 수 있겠지. 협동경제 블록을 쌓아서 이 영역을 넓혀 나가자는 것인데, 상지대와 협약을 맺어 세운 협동사회경제연구원이나 사회적기업지원센터 등이 도움이 될 거고, 지금 있는 협동체가 새로운 기업이 태어나고 자라는 기본 바탕이 되겠지. 이 일을 해 나가려면 몬드라곤의 인민은행 같은 협동기금이 필요해서 5년째 논의 중이니까 머지않아 성과를 낼 수 있을 거야.”

국가 통계에만 익숙한 제 귀에는 이런 말씀이 아주 낯설었어요. 지금은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지만 우리는 어릴 때 ‘국민’학교를 다녔고 또 커서도 신문이나 방송, 책과 잡지를 보면서 ‘국가와 민족’에 대한 얘기에 몰두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국가’ 단위의 사고에 물들어 있지 않나 싶어요. 원주사람들은 아마도 원주가 중심이고 서울이 지방이라는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생명의 기본은 밥이니까 밥을 중심에 놓고 봤을 때, 모든 산업의 중심은 농업이고 농업을 중심에 놓고 보면, 지역이 눈에 들어오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스개 소리 하나 하자면 제가 살고 있는 곳은 강원도 화천이고 이곳의 주산물은 애호박이예요. 그러니까 온 밭에 널린 게 애호박인데 화천 읍내 슈퍼마켓에는 뚱딴지 같이 ‘안동 애호박’이 떡 놓여있더라는 얘기를 새로 화천으로 들어온 친구가 하는 겁니다. 우째 이런 일이?


4. 

이제 정인재선생님 얘기를 좀 해야 할 듯합니다. 원주라는 동네, 원주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이 분을 잘 모릅니다. 중간중간 귀동냥한 바에 따르면 원주교구에서 오래 일을 보셨고 밝음신협 이사장도 하셨는데, 이때 빈곤층과 노숙인이 신협(누리협동조합, 갈거리협동조합) 꾸리는 일을 지원하셨다는 것 같아요. 깊이 머리를 숙이시며 공손하게 두 손으로 제게 건네주신 명함에는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이사장이라 적혀 있습니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김용우 선생님께 인터뷰 요청을 하니까 저녁 식사 자리에 저를 부르셨어요. 얼마 전에 있었던 정선생님 칠순 잔치에 미처 참석하지 못 한 분들이 정선생님께 저녁을 대접하는 자리였어요. 홍천 갑천에서 오신 학교선생님도 계셨고, 밝음신협에서 일하는 무위당 선생님 조카 분, 국사편찬위원회에 근무하면서 회사 일과 별개로 혼자 원주를 연구하는 분 등이 함께 했어요. 저는 그저 불쑥 끼어든 겁니다. 어른이 옆에 계시면 어렵고 쩔쩔매기 일쑨데 도통 권위 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먼 분들이어서 그런지 편안하고 즐거웠어요.

열심히 먹고 떠들던 저를 한참 지켜보시던 정선생님이 이것저것 물으세요. 어디 사느냐? 화천 오음리 살아요. 고향이 어디냐? 전라도 옥굽니다. 전라도 사람이 왜 전라도 말을 하나도 안 쓰느냐? 고향 가면 저도 전라도 말 나와요. 귀농이란 게, 거, 동네 사람들하고 담 쌓고 사는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 동네 형들하고 계 묻어서 재밌게 잘 놀고 있어요. 귀농이란 게, 거, 아내를 너무 고생시키는 거 아니냐? 예, 맞아요. 왜 아내를 시골로 데리고 와서 고생을 시키느냐? 집사람이 먼저 저를 부추긴 거예요. 그런데 동네 형들하고 계 묻어서 뭐하니? 먹고 놀고 여행가고 그래요. 몇 명이나 모여서 계를 하니? 여섯 명 정도 돼요.

그러면 그러지 말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봐요. 조합을 하려면 힘든데, 회계 보고 자료 정리하고 이런 거 아주 골치 아프거든, 자 보세요, 손을 펴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아주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한 사람이 우선 출자를 하면 계정이 여섯 개가 만들어져야 해, 출자 계정이 만들어지고, 대출을 해가면 대출 계정이 있어야 하고, 한 번에 다 갚는 게 아니고 나누어서 갚아 나가는 거니까 상환 계정이 있어야 되고……, 이런 복잡한 걸 혼자 하는 게 아니란 말이예요, 함께 모여서 하고, 서로 돌아가면서 맡아 하면서 배우고 이런 거거든….

용우 형을 상대로, 지금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이런 문제가 있고 저런 한계가 있고 이러저러해서 어렵고 앞날이 이렇고 저렇고 해서 캄캄하고 그래서 협동조합정신은 오간데 없고 그저 장삿속으로만 나가면서 농사꾼들 몰아가는 것 아니냐고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이것저것 묻고 떠들던 저를 보면서 그저 빙긋이 웃으시던 분이, 느린 몸짓과 낮고 작은 목소리로 슬슬 수작을 걸어오시더란 얘깁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앉아 얘기 나누면서 김용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깊게 울립니다. “우리 학교 앞에 남한강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이 크고 넓은 강만 보지, 이 강이 금대봉 어느 골짝 나무 잎사귀에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에서 시작됐다는 건 못 본단 말이야.”(끝)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설명 자료와 김용우 선생님이 쓴 여러 글을 참조했습니다.

이 글들은 한알학교 홈페이지 안에 있는 느티나무 카페에서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

김용우, 원주지역의 생명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전개과정 고찰

김용우, 진정한 지역공동체운동으로 성장하는 의료생협

김용우, 생명사상 및 운동의 초기 형성과 전개-원주를 중심으로

김용우, 생명운동과 생활협동조합

김용우, 무위당의 생명협동사상과 시민사회의 발전


1) 백승우, 고생고생 사람 잡던 보리농사, 귀농통문29호, 2004

2) 김용우, “건강한 공동체적 삶”,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