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농업연수

이. 쿠바유기농업 연수

아하 2012. 12. 26. 19:24

 쿠바 유기농업 연수

2012년 10월 12일, 대산농촌문화재단으로부터 쿠바유기농업연수 참가 확정 통보를 받았다. 게다가 10월 12일은 내 양력 생일이다. 억수로 기뻤다. 9월 말 추석 연휴 직전에 연수 참가 신청서를 냈다. 기다리는 내내 쿠바 갈 생각에 신이 나서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일이 힘 드는 줄도 몰랐다. 10월 11일에 연수 참가에 대한 가부를 통보해주겠다고 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풀이 팍 죽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연락이 왔다. 하루 만의 반전이었다. 아싸, 쿠바! 좋은 생일 선물이었다.

 

열정적으로 연수단을 지도해주신 지도교수 김성훈 전농림부장관님

 

대산농촌문화재단은 교보생명 창립자인 대산 신용호(1917~2003)선생이 1981년 설립한 농업․농촌 지원 공익재단이다. “농업이 미래다. 농촌이 희망이다”를 으뜸구호로 하는 이 단체의 존재는, 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물질만능 대한민국에서 참으로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대산농촌문화재단의 창립이념은 네 가지로 되어 있다. 첨단농업기술진흥․농업구조개선․복지농촌건설․인류복지증진 등이다. 언뜻 보면 네 가지 이념은 서로 상충되는 걸로 보인다.

우선 첨단농업기술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한 편으로 첨단 과학기술인 유전자조작을 가한 첨단 종자를 뿌리고 컴퓨터로 조작하는 최첨단 대규모 정밀기계로 땅을 갈고 수확하여 가공하며, 최첨단 화학농자재라 할 수 있는 선택성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살포해서 짓는 대규모 단작농업을 첨단농업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원의 순환․생물다양성 증진․생태계 유지를 목표로, 사라져가는 토종종자를 복원하고 옛날 농가들처럼 집집마다 너무 많지 않은 가축을 길러 농가부산물을 활용하고 기계와 외부자원의 투입을 최소화하며 자급자족을 우선으로 하는 소량다품종 농사를 유기적인 방식으로 짓는 농법 역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한 최첨단농업이라 할 수 있다.

농업구조개선과 관련해서도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시장 중심 경쟁력 지상주의다.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업총생산의 비중은 2%남짓에 불과한데 농민의 수는 6%가 넘으며, 농업에 들어가는 정부예산역시 6%가 넘는 작금의 현실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으며 따라서 총생산의 비율과 농업인구의 비율이 비슷해질 때까지 농업인구를 계속해서 쉬지 않고 줄여나가는데 박차를 가해야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 산업 사회가 몰고 온 인류의 심각한 위기 상황, 즉 인간성 상실․공동체 붕괴․자연환경 파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농촌공동체를 복원하고 농업을 기초로 한 새로운 문명, 대안문명을 창조하는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그러기 위해서는 농촌의 토대를 더욱 굳건히 해야 하고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사꾼은 더욱 늘어나야 하며 나아가 국민 전체가 단 한 평이라도 농사를 짓는 국민농업시대, 생활농업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세계최초로 교육보험을 만들어낸 대산 신용호선생(1917~2003).

농촌문화재단 외에도 공익사업을 하는 여러 문화재단을 설립하셨다.

사진출처 : 영암군 덕진면 향우회 카페 http://cafe.daum.net/dakjin

거대기업을 이끌어가는 기업가로서 농촌문화재단을 만들 정도로 굉장한 통찰과 혜안을 갖고 계셨을 것으로 보이는 대산 선생이 만약 지금 살아계셨다면 어느 길로 향하셨을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나를 쿠바로 불러들인 건 혁명도 살사도 아니고 농업, 그것도 유기농업이었다. 나는 혁명가도 여행가도 땐서도 음아가도 아니고 농사꾼이었던 것이다. 농사꾼 만세다! 스무 명이 가는 대산농촌문화재단 해외농업연수단의 일원이 되어 쿠바에 가게 되었다. 혹시나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못 가게 되지 않았나 싶어서 조금 마음이 쓰이기도 했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담당 과장님이 얘기해 주셔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유난히 뜨겁고 가물었던 2012년 여름 상반기, 애호박․풋고추․오이․가지․토마토 등 과채류 농사는 대풍이었다. 공급과잉과 소비침체로 출하를 거의 못 하다시피하며 시간을 다 까먹었다. 8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태풍이 몰아치고 비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수확할 게 없어서 또 시간을 다 까먹었다. 이렇게저렇게 출하를 못 하거나 수확을 못 하거나 하면서 시간만 다 까먹고 농사를 거의 망치다시피하면서 한 해를 보내고 말아 꿀꿀하고 우울하던 2012년이 쿠바 농업연수가 결정되면서 갑자기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농사 뒷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고 일찌감치 김장을 했다. 짬을 내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자료를 뒤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