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농업연수

삼. 원래 쿠바에는 누가 살았을까?

아하 2013. 1. 7. 23:24

원래 쿠바에는 누가 살았을까?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인(원래의 주인이란 의미로 “원주인”이라 쓰기로 한다)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쿠바에 들떠 있는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물었다.

“거의 다 죽은 거 아냐?”라고 대답했다.

“전쟁보다는 스페인 사람들이 몸에 붙여 들여온 병균에 감염돼서 죽은 거 아닌가?”라고 내가 덧붙였다.

“아닐 걸…….”이라며 아내는 입맛을 다셨다.

고백컨대 연수를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기 전까지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아즈텍이니 잉카니 마야니 하는 말들이 어쩐지 문명 이전 혹은 고대문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막연하고 희미하게 잘 못 인지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인들의 멸종 역시, 동물도 아니고 인간 종이, 거의 멸종에 가까운 상태에 이를 수 있는 다른 이유가 병 말고 달리 또 있겠나 하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아메리카 모든 나라의 역사는 1492년 10월 12일을 출발점으로 한다(10월 12일은 자꾸 나온다). 콜롬버스가 쿠바 옆에 늘어서 있는 바하마군도(에 있는 조그만 섬)에 도착한 날이다. 1492년은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던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 사람들 관점에서 보자면 잃어버렸던 땅을 모두 되찾은 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이때 무슨 짓을 하고 있었을까? 이성계가 군사쿠데타에 성공해서 기존 권력자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새로운 군사정부를 구성한 해가 1392년이다. 일본이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해온 임진년은 1592년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대륙 옆구리 조그만 섬에 상륙한 해는 그러니까 조선시대(1392~1910)를 둘로 잘라 상하반기로 나눴을 때, 상반기의 딱 한가운데다. 당시의 조선 임금은 성종(재위 1469~1494)으로 말년에 해당한다. 군사력을 앞세워 정권을 차지한 이성계와 이방원, 이유(세조. 재위 1455~1468) 등의 시대가 끝나고 조선은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군사쿠데타에서 공을 세우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대충 늙어 사라지고 사림파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엘리트들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던 왕의 부름을 받고 속속 상경하여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하는 권력 교체기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몰려와 쿠바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분탕질하며 약탈하고 살해하는 16세기, 조선 권력층은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고 빼앗는 권력투쟁에 본격적으로 몰입한다. 조선의 정치엘리트들은 조정에 나란히 서서 근엄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나라 살림을 의논하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붙잡아다가 고문하고 살해하고, 그 사람의 재산과 아내와 자녀를 서로 빼앗아 나누어 가지고 성노리개로 삼거나 노비로 부리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짓거리들을 ‘정치’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의 16세기는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로 이어지는 사화의 시대였다. 정치가 개판이면 당연히 도적이 날뛰게 되는데 의적 임꺽정(?~1562)이 힘과 의로움을 뽐낸 때도 이 때다.

대학교수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역사학자로서 노암촘스키와 함께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일컬어진다는 미국사람 하워드 진은 『미국민중사』를 쓰면서 앞머리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둔감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역사를 대하는 나의 접근법이다.”(하워드진 지음 유강은 옮김, 미국민중사1, 시울, 2006년. 33쪽)라고 썼다. “과거를 향해 던져진 눈물과 분노는 현재를 위한 우리의 도덕적 에너지를 고갈시켜버린다.”(앞의 책, 32쪽)라고도 썼다.

 

내 역사 인식의 기본 틀을 바꿔주었다. 이제야 읽다니ㅠㅠ

 

인간 종을 멸종시켜버릴 정도의 끔찍하고 잔혹한 행위가 낱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16세기 쿠바 자료를 검토하는 일 역시 “할 수 있는 한 가장 둔감해지는” 태도를 필요로 했다. 누군가를 “야만인”이라 불러야 한다면 콜롬버스를 포함해서 아메리카로 몰려온 유럽인들을 제일 먼저 “야만인”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