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농업연수

십이. 유기농업을 둘러싼 "의제설정"이 중요하다

아하 2013. 1. 23. 13:56

유기농업을 둘러싼 “의제 설정”이 중요하다

 

요즘 “프레임”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한국의 농업 혹은 유기농업과 관련해서도 이는 정말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레임을 잘 짜야 성공할 수 있다. 내가 제시하는 건 공공재 프레임이다. 대강의 얼개는 이렇다.

 

농산물은 공공재이다. 공공재는 남녀노소 부자 가난뱅이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서비스되어야 한다. 공공재의 첫째 조건은 안전성이다. 

 

공공의 재화를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 즉 책임과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세금도 내고 교육도 받고 공부도 하고 성실히 일을 해서 성과를 내고 필요한 서류도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한편 정부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일정한 수의 공무원을 확보해야 하고 이들이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독성 물질 살포와 같은 위험한 일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적절한 방식으로 이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한다.

 

쿠바는 이렇게 하고 있다. 이것이 쿠바 유기농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인 것 같다. 농사꾼 생존권을 보장하라, 농사꾼 먹고 살기 힘드니까 도와 달라, 이런 건 이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농사꾼인 나조차도 별로 공감이 안 된다. 도시 비정규직 노동자가 1,000만이 넘는 시대다. 이들에 비하면 농사꾼들 먹고 살만하지 않느냐라고 누가 물으면 뭐라 답할 것인가? 고령 농가? 고령 영세 농가는 사회 복지 시스템이 작동해서 보호하도록 해야 한다. 이미 은퇴할 나이를 지난 이 분들을 볼모로 잡고 농업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그들의 농업노동은 즐거워보였다.

 

농산물이 왜 공공재냐라고 누가 물었을 때, 가장 강력한 논거가 되는 것은 농업의 다원적 기능 여덟 가지(국토보전기능, 수자원 함양, 자연환경의 보전, 경관의 형성, 보건 휴양, 문화적 소산의 전승, 지역사회의 유지 및 활성화, 식량안전보장 등)이고, 이런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대표적인 작물은 쌀이다. 농사가 농사꾼 개인의 사적인 경제 행위가 아니고 국방이나 치안 기초행정업무 등과 같은 공공서비스로 정의되고, 농산물이 공공의 재화로 자리 잡고, 농사꾼이 공무수행요원으로 정착되는 첫걸음은 그래서 당연히 쌀부터 시작해야 한다. 쌀로부터 시작해서 잡곡으로 점차 확대하고 기초농산물 전반으로 확대하고 최종적으로 전체 농산물에 대해 시행한다. 

 

한 가구가 충분히 친-환경적인 방식(자원순환, 생물다양성 증진, 생태계 균형 유지를 목적으로 토양의 생물학적 자급력과 비옥도 증진을 위한 과학적 실천으로서 의 농경)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적정 규모를 산출한다. 우리 친환경 쌀이 가공식품의 원료로 쓰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격을 낮춘다. 농사꾼은 적정 규모의 농사를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지어야 하고, 매년 일정 시간 이상의 친-환경 농업과 관련한 교육을 받아 자격을 획득 갱신하여 스스로 친환경농업인의 여건을 갖추고 있음을 입증한다. 농업 소득에 대해 세금을 충실히 납부한다. 

 

쌀농사를 짓는 가구가 쌀값을 받아 지출해야 하는 소비지출 항목 중, 의식주교육의료 등 기초생활비에 해당하는 소비지출에 대해서는 사회가 완벽하게 무상으로 농가에 제공한다. 쌀값을 충분히 낮춘 데 대한 대가다. 예를 들면 농가 자녀에 대해 학비는 물론 학습 도구 구입비와 도시유학 시의 주거 제공 및 일정한 생활비 지급 등을 포함하는 완벽한 무상 교육 서비스, 치과 치료를 포함한 완전한 무상 의료 서비스, 일정한 수준의 겨울 난방비 지급, 주택 수리 및 관리에 들어가는 일정한 비용 지급 등이다.

 

이것은 소비자와 농사꾼 사이의 일종의 사회적 거래다. 서로에게 아주 좋은 거래라 생각한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50대 이하의 합리적인 사유를 하는 젊은 농사꾼들은 이와 같은 방식의 거래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이 거래가 잘 작동하도록  인센티브(쿠바에서 얼마나 자주 들은 말인가!)와 페널티를 치밀하게 배치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일본 사람들이나 중국 사람들이 몰려와서 헐값인 우리 쌀을 막 사가려 할 수 있으므로 쌀 국외 반출에 대한 규제도 마련해야 한다. 물론 북한에서 쌀 사러 오면 더 싸게 DC해 주는 게 좋겠다.

 

후계농업인을 확보한 농가가 4%밖에 안 되는 초초고령화된 농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미래에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농촌이 유지될 수 있는 최후의 유력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키워드는 “농산물=공공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