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농업연수

쿠바가 아니라 우리가 대안이다

아하 2013. 2. 16. 12:18

*이 글은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의 요청을 받아 썼습니다. 아마도 2013년 1~2월호에 실렸을 겁니다. "유기농업"이라는 딱지를 떼버리고, "대안사회"로서 쿠바를 가늠해보는 것인데요,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에 내재하는 [농업유전자]라는 개념입니다. 앞으로 조금 더 갈고 닦아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막연하고 뿌연 형태로 남아 있던 오리엔탈리즘과의 제법 철저한 결별, 우리가 대안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같은 것에 대해서 논거 없이 그냥 깜냥으로 적어보았습니다. 생각을 가다듬고, 글 쓸 기회를 주신 도서출판 민들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쿠바, 기로에 선 20대



백승우 

두레 생협에 여름철 채소를 주로 공급하는 유기농업단체 "강원유기농"의 꼴찌 농부. 강원도 화천에서, 농사를 하늘이 주신 업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짓지만 여전히 서툴다. <아미쉬 공동체>를 함께 번역했고, <내 손으로 가꾸는 유기농텃밭>, <토종 곡식, 씨앗에 깃든 우리의 미래> 등을 함께 썼다.



지난해 겨울, 쿠바 다녀온 이야길 좀 해보려 합니다.

쿠바에 머문 날은 고작 보름 정도입니다. 그 중 일주일은 연수단 공식일정이었고, 나머지 일주일은 비공식 일정이었습니다. 연수단 공식일정은 주로 관공서와 시범농장에서 브리핑 받는 것이었고, 나머지 일주일은 통역도 없이 함께 여행하신 분의 떠듬떠듬하는 스페인어에 기대서 몇 개 지역을 둘러본 정도입니다. 겨우 이런 정도의 경험으로 낯선 나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한다는 게 좀 그렇습니다. 막 다녀와서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얼른 할 말 다 해버리고 모르쇠 하는 게 상책입니다.

공식 브리핑이라는 게, 다들 아시겠지만 글이든 영상이든 뻥이 많찮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뺄 것 빼고 넣을 건 넣는 식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바를 만들어 낼 수 있잖아요. 그리고 또 사람들은 밋밋하기 짝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뭔가 극적인 걸 더 좋아하니까, 그럴듯하게 만드는 가공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브리핑은 그러니까, 우리 같은 농사꾼들은 대~충 흘려듣고 마는 거죠.

그럼 뭔 얘기를 할 건가? 뻔한 겁니다. 쿠바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를 검토해서 필요한 몇 가지 정보를 슬쩍 가져다가 인상적인 경험 몇 개랑 잘 버무리면서 우리 얘길 하는 거죠, 하하. 우리 농업, 농촌, 농사꾼에 대한 얘기라면 몇 날 몇 밤을 혼자 떠들어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하니까 말이죠.


농민 유전자가 사라져버린 나라, 쿠바


쿠바는 19세기 내내 독립전쟁을 치룹니다. 제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것인데요, 독립운동 과정이 언제나 그렇듯이, 독립한 이후의 국가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놓고 지배 엘리트들과 민중계급이 주도권을 놓고 쟁투합니다. 독립전쟁은 1902년 미국의 군사개입으로, 미국 산업자본가들과 결탁한 쿠바 지배엘리트들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이후 1959년 무장게릴라들의 혁명이 성공하는 날까지, 쿠바는 극소수의 지배엘리트와 미국 산업자본의 나라였습니다. 수도 아바나는 관광객과 깡패, 거지, 창녀, 노름꾼이 우글거리는 거대한 집창촌으로 변해갑니다.

소수 게릴라들이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폭력 혁명을 일으켜 성립한 혁명정부는 미국 대토지 소유주들의 땅을 국유화하거나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석유산업시설과 광산 등을 미국 산업자본가에게 빼앗아 국유화 해버리고, 온갖 사회적 폐해를 일으키는 국제관광을 폐쇄하고 나라 문을 걸어 잠궈 버립니다. 혁명정부는 ‘호혜성의 원리, 부의 공정한 분배, 사회경제적 정의에 기초한 사회’ 건설에 착수합니다. 그렇게 혁명정부의 사회장악력이 커지면서 전통적 의미의 농사꾼은 몰락합니다. 농지의 대부분은 국영농장으로 흡수되고, 나머지도 협동농장으로 재편되지요. 국토의 80%에 이르는 넓은 농지는 사탕수수가 뒤덮어 버립니다.


우리나라 농업문제를 쭉 추적해 들어가다 보면 맨 끝에 대기업이 나옵니다. 식량자급율 25%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 국민들이 먹는 음식의 75%가 수입농산물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소리! 난 국산 농산물만 먹는데!”

“그럴까요?”

빵 과자 라면 국수 두부 튀김가루 부침가루 식용유 음료수 짜장면 짬뽕 간장 된장 막걸리 김밥 소주 맥주 등등등 원재료는 모두 수입 농산물이고, 대부분 대기업이 만듭니다. 아니면 수입 농산물을 가공한 식품 원재료를 대기업이 만듭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우유 달걀 등을 생산하는 사료 역시 수입농산물입니다. 사료도 대기업이 만듭니다. 국민 모두가 수입 농산물을 일상적으로 먹고 살면서도 수입 농산물을 먹고 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이상한 나라예요. 대기업은 어떤 사회적 제재도 없이 100% 수입농산물로 만든 식품을 잘 팔아먹고 있지요. 의아한 대목입니다. 최소한 10%라도, 아니면 적어도 5%라도 국내 농산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어떤 규제도 없습니다.

“거, 경쟁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요?”

산업화된 나라에서, 농산물 가격을 시장이 결정한다고 말하는 건 완전 사기입니다. 자유시장의 화신처럼 인식되는 미국조차도, 전체 농업 소득의 50%는 정부에서 농가에 이전해준 이전소득입니다. 유럽은 그 비율이 73%에 이른다고 하지요. 미국의 경우 농사 주체가 우리 같은 가족농이라기보다는 기업에 가깝고, 전체 농업 예산의 50% 정도를 농기업 소득 보전을 위해 직접 지불하는데, 그 중 90% 정도는 상위 10%의 대규모 농기업에 이전된다고 해요. FTA를 강요하고, 값싼 수입농산물을 들이대는 거대 농기업 뒤에는 엄청난 정부보조금이 있는 거지요.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하는 상상할 수 없이 넓고 풍요로운 땅덩어리에서도 말이죠, 농산물이 원래 싼 게 아니구요, 정부 보조금을 투입해서 농산물 가격을 떨어뜨리는 거란 말입니다.


쿠바 혁명 정부는 설탕을 팔아서 식량, 석유, 자동차, 기계 등 필요한 걸 사다 썼어요. 소련이 국제시세보다 5.6배 정도 비싸게 설탕 값을 쳐주고, 석유는 훨씬 싸게 값을 매겨서 물물교환 형태로 교역을 했어요. 쿠바는 돈이 필요하면 싸게 들여온 석유를 다른 나라에 되팔아 먹기도 했다고 해요. 받는 거보다 주는 게 많아도 대충 퉁쳐주고, 필요하면 돈도 꿔주고, 이자도 안 받고 빚 독촉도 안 하는 형님으로부터 엄청난 경제적 특혜를 받았지요. 남한과 거의 같은 넓이의 땅에 1,100만 명밖에 안 되는 인구, 연중 따뜻한 열대성 기후, 너른 평야, 세계에서 가장 공평한 사회적 부의 분배, 특혜에 가까운 외부로부터의 자원 유입 등, 이런 안온한 자연․정치․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쿠바는 살 만한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적게 일하고 많이 놀았지요. 공부하고(문맹율 거의 제로)․운동하고(야구)․춤추고(살사)․노래하고(재즈)․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의사와 교사를 길러내고, 의료진을 파견해 헐벗고 가난한 나라를 돌봐주고, 세계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며, 삼십여 년 좋은 세월을 보낸 듯합니다.


“쿠바가 뭐가 그리 좋습니까?” 우리 연수단 통역을 해준, 쿠바 남성과 결혼한 정호현씨, 그리고 쿠바에서 일 년 정도 일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젊은 친구 얘기로는, 무엇보다 권위적이지 않은, 수평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가장 만족스럽다고 해요. 모두가 다 서로 친구인 거죠. 피부색깔이나 머리칼 모양이나 종교․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서로 친구 먹고, 자기 인생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 준다는 거지요. 특히 여성 입장에서는 숨통이 탁 트인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복지국가들처럼 가족이 해체되지도 않고 말이죠. 여전히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확장된 가족 속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로 훌쩍 이사가버릴 확률이 희박한 친숙한 이웃과 밀착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거죠. 든든한 사회적 자본을 축적한 겁니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마음에 꼭 들어요. 그런데요,

좋은 세월을 보낸 30년 동안, 1959년 혁명 당시 소수 무장 게릴라들의 절대적 지지자이며 협력자였고 혁명의 이유였던, 그 많던 농사꾼들은 다 어찌되었을까요? 사라져버렸습니다. 도시가 다 흡수해버렸어요. 전체 인구의 80%가 도시에 거주하고, 농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농사를 짓는 사람은 20% 정도에 불과하고 다들 도시로 출퇴근하는 일자리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사회과학 공부하신 분들은 다 아시죠? 사회주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도 농사꾼, 땅을 가진 자작농들은 쁘띠부르주아로 취급되고, 혁명의 걸림돌로 인식되잖아요? 피델 카스트로 역시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해요. 자료에 따르면 새 사회 건설 과정에서 자유농민시장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데, 문을 닫으면 암시장이 열리고, 문을 열면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부의 불균등이 나타나니,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자영농들은 이래도 저래도 골칫거리였던 거지요. 카스트로는 경제위기가 닥친 후에도 끝까지 시장 개설에 반대하다가 성난 아바나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고,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동생 라울 카스트로마저 “콩이 대포보다 중요하다”며 압박하자 어쩔 수 없이 1994년에야 농민자유시장을 다시 열게 되는데, 그건 나중 얘기고요, 혁명정부는 전체 농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영농장과 협동농장을 통해 오로지 사탕수수 생산에 총력 매진합니다. 대규모 농기계를 동원하는 화학 영농으로 사탕수수 천만 톤 생산을 목표로 돌진하지만, 8백만 톤 정도를 최고점으로 더 이상 나가지는 못했습니다. 모든 국부의 원천이 사탕수수였으니까 그럴 만도 한 것인데요, 어느 날 갑자기 소련이 망해버렸습니다. 이제 농사꾼을 업신여긴 대가를 치러야 할 차례입니다.


1990년, 쿠바는 수출도 수입도 다 막혀버렸습니다. 대형 농기계와 농약 비료에 의존했던 대규모 플랜테이션 사탕수수 농업은 궤멸해버립니다. 당장 굶기 시작합니다. 카스트로 정권의 붕괴를 기대하는 미국의 경제봉쇄는 더욱 강화되고, 달러는 없고 식량 생산 기반도 없으니, 전국민을 대상으로 탄탄하게 지탱해온 무상급식체제도 끝장날 판입니다. 보통 이와 같은 사회적 위기는 강자에게는 기회고 약자에겐 재앙이지요. 사회 맨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쓰러집니다. 보리쌀 한 가마 빌려주고 알토란같은 옥답을 빼앗는 약육강식의 야만이 펼쳐집니다. 우리도 90년대 말에 경험했잖아요? 그래서 우리 사회의 지배엘리트들은 끊임없이 사회 위기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한사코 사회를 몰아가려는 것이겠지요. 시민사회 세력은 온몸을 던져 막아서는 거구요

우리 연수단이 방문한 여러 기관의 책임자들은 모두 그때의 위기 상황을 언급했습니다. 벌써 20년이나 됐는데, 마치 어제 일인 양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들 얘기하지요. “그 위기에서 우리는 단 한 명의 아사자도 내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들, 어린이와 환자와 노인에게 맨 먼저 음식을 먹였다.” 멋진 사회 아닙니까?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요? 먹고 자고 공부하고 아플 때 치료받는 것을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로 인정하고, 이런 일들에는 그저 푼돈만 써도 되는, 필요에 기초한 사회가 갖는 힘과 품격이라 할 수 있겠지요. 

쿠바의 유기농업은 어쨌든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인데요, (석유도 농약도 비료도 없으니 어떻게든 있는 걸 가지고 농사는 지어야 되지 않겠어요?) 근데 제가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은 거예요. 당장 먹을 게 없는데 왜 곡식 농사를 짓지 않고 채소 농사나 짓고 있느냐 말이죠. 이상하잖아요? 열심히 발품을 팔며 돌아다녀 보아도, 이제 한 달 중 2주 분량밖에 식량을 공급하지 않는다는 배급소에는 빵만 잔뜩 쌓여 있는 거예요. 더운 나라 쿠바에서는 밀농사는 아예 안 돼요. 농민시장엘 가 봐도 채소나 과일만 있지 식량이 없어요. 식량 작물은 보통 쌀․보리․콩․밀․옥수수․감자․고구마․기타 잡곡(조․수수․기장․귀리) 등 여덟 가지를 말하는데, 눈에 안 보여요. 눈에 안 보이는 걸 보려면 자료를 통해 볼 수밖에 없는데요, 10여 년에 걸친 현지 연구 성과를 무미건조한 문체로 차분히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비교적 최근에 발간된 자료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합니다. 제가 보름 동안 느끼고 경험한 바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카스트로는 고도로 안정적이고 잘 조직된 이웃공동체가 사회와 국제관광에 의해 추동되는 경제를 쿠바인들에게 남겨 놓았다. 비록 카스트로가 쿠바를 ‘특별시기’의 암울한 사회경제적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생산성과 관련된 심각한 경제문제들도 남겼다. 쌀, 콩, 가금류, 돼지고기, 쇠고기, 기타 필수 식료품의 수입 증가로 인한 식량 의존 심화, 교통문제, 주택위기, 좀도둑과 부패 등이 여전히 남아 있다.(헨리루이스 테일러, 정진상 옮김, 쿠바식으로 산다 : 밑바닥에서 본 아바나의 이웃공동체, 삼천리, 2010, 271쪽.)


강원도 산골짜기, 한반도 한가운데 있는 화천 우리 집에 오시는 도시 손님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야~, 경치 좋다. 정말 좋은 데 사네!” 그런데, 전라도 너른 평야에서 올라온 동갑내기 농사꾼 친구는 있는 대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데서 뭐 해 먹고 사냐?”(웃음). 역시 농사꾼의 눈은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습니다. 국토의 70%에 이른다고 하지요. 산이 축복인 걸 그 동안 몰랐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잡아 두었다가 연중 끊이지 않고 흘려보내서 내를 이루고 강으로 흘러, 인간들이 물을 돌려 가두어 벼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합니다. 벼는 연작장애도 없고, 단위면적당 칼로리 생산량에서도 버금(으뜸은 고구마)가며, 저장성도 뛰어납니다. 산과 들과 강과 쌀은 이 땅에 인간이라고 하는 종족의 번성과 지속을 가능케 하는, 하늘이 주신 축복이었구나라고 새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전 국토의 절반, 그것도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바라본 것에 불과하지만, 쿠바의 땅은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였어요. 지도에 보면 산은 북서부와 남동부에 조금밖에 없어요. 산이 없으니 강이 없고, 물이 없으니 땅은,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버려진 채인 거지요. 대부분 초지였고 소나 말이 몇 마리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어요. 농촌이든 도시든 놀고 있는 빈 땅은 수두룩한데 왜 농사지어 먹을 생각을 안 하는 걸까요?

곰곰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에게는 농사 유전자가 없는 거예요. 농업 전통이 없어요. 원래 살던 땅주인을 모조리 살해하고 침략자들이 건설한 소위 새로운 문명이란 것은 야만의 극치였고, 그 역사 또한 4백여 년에 불과하지요. 농사꾼의 눈으로 봤을 때 쿠바는 자급자족하는 소농을 바탕으로 사회를 운영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미개한 나라일 뿐인 겁니다.

뜨거운 맛을 본 쿠바는 뒤늦게 국영농장을 단계적으로 해체하고, 농사짓기를 원하는 개인과 단체에게 땅을 임대해서 농업 생산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에 착수했다고 하는데요, 글쎄요, 성공할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해도, 밀봉했던 국제관광이라는 판도라 상자를 다시 열어버린 쿠바가 새로운 농경문화를 만들어 내리라고 기대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처럼 참으로 오랜 농업 전통을 가진, 농경 유전자를 장착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도 농사꾼은 멸종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말이죠. 


뱀다리,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


여기서부터는 긴가민가해서 하지 않고 꾹꾹 참은 말들인데요, 그래도 민들레 독자들과는 나누고 싶네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하는 얘기니까 너무 속에 넣어놓진 마시고, 한번쯤 흘려 들어보세요.


쿠바를 먹여 살릴 책임을 설탕에서 이어받은 핵심 산업은 국제관광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외화벌이 1위 자리를 넘겨받을 쿠바의 신성장동력은 의약산업입니다. 쿠바에서 개발한 식물추출 당뇨병 치료제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쿠바는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들도 이 약을 복용할 수 있게 매우 저렴한 값에 국제 시장에 약을 판매한다는 얘길 얼핏 들었지요. 그래서 물었더니, 유전생명공학센터 판매 책임자는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했습니다.

“약값은 시장이 결정한다!”

분위기 썰렁했어요. 쿠바는 이제 시작하는 나라에 불과합니다.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스페인 3백년, 미국 60년, 소련 30년. 4백 년 가까운 종속을 끝내고 새로 시작한 지 이제 겨우 20년 된 신생 독립국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 사회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정부를 이끌고 있는 라울 카스트로도 모를 거예요. 역동적이지요. 이미 갈 길이 꽤 정해져 있는 우리하고는 또 다릅니다.

기회요소도 있고 위험요소도 있습니다. 기회요소와 관련해서는 위에서 많이 얘기가 된 것 같구요, 제일 큰 위험요소는 소비주의라고 합니다. 자기정체성을 “멋진” “폼 나는” 소비에 두는 인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거지요. 그 동안 탄탄하게 쌓아온 쿠바의 저력은 “필요에 기초한 소비”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가난하고 창조적인 인민들에게서 비롯한 것이었는데, 지금 매우 빠르게 욕구에 기초한 사회로 전환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이미 경험한 것들이죠. 필연적인 결과는 빈부격차입니다. 처음 그 땅을 밟은 저 같은 이방인의 눈에도 빈부격차가 보일 정도니까,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 격차는 점차 커지겠지요. 경제가 최우선인 개발 독재에서 빈부격차는 적절히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소비와 소유를 향한 인민들의 분출하는 욕구는 더더욱 그렇지요. 국제관광은 이를 더욱 부추길 것이구요.

또한 우리가 이미, 그리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듯이 관료들의 비효율과 비리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2012년 연초에도 자동차(우리나라 현대자동차입니다. 멕시코에서 생산한 차와 부품을 아르메니아인이 사장인 회사가 독점해서 정부에 납품했다고 합니다.) 납품과 관련한 부패 스캔들로 나라가 휘청거렸다고 해요.

미국과의 적대적인 관계는 제가 보기에는 남북관계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서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는 거지요. 군사적인 긴장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가상 적국의 설정은 내부 결속과 통제에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나는 일은 아닙니다. 화해하고 교류하는 것도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고 봐야겠죠. 경제적인 이유보다 정치적인 이유로 향후 방향이 결정될 겁니다.

쿠바의 쌩얼을 꼭 보고 오겠다는 것이 당초의 목표였고 그래서 연수단과 함께 돌아오지 않고 일주일이나 더 머물렀던 것인데요, 개인적으로 쿠바에 다녀온 최고의 성과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유럽과 미국의 쌩얼을 본 것입니다. 소위 유럽 근대 문명이며 미국의 독립과 번영이란 것이, 기실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자라난 흡혈의 문명이라는 것, 여전히 흡혈하지 않으면 지탱될 수 없는 최악의 문명이라는 것이 그냥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은, 혁명 이전의 쿠바는,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괴물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봐야겠지요.

사계절 따뜻하고 산도 그리 많지 않고 간혹 허리케인이 닥칠 뿐 자연재해도 거의 없는 아늑하고 아름답고 일 년 내내 먹을 게 풍성한 커다란 섬에서, 개체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던 사람들은 어쩌면 인류가 가 닿을 수 있는 최선의 사회를 만들어 살고 있었을 거예요. 도무지 싸울 이유도, 쎄가 빠지도록 일할 이유도, 남의 것을 빼앗을 아무런 이유도 없어요. 늘 더워서 싸울 마음도 안 날 것 같아요. 소유 개념도 별로 없고 아낌없이 나누고 늘 이웃을 돌보고 반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이었겠죠. 실제로 그리 살았다는 기록도 많이 있고요. 도살자들이 들이닥친 15세기 말까지는 말이죠. 우리로 치면 조선 성종 재위기입니다. 먼 과거 구석기 시대 얘기가 아니에요. 얼마 안 된 일입니다.


유기농업과 대안사회의 모델처럼 여겼던 쿠바를 다녀와서 우리에겐 모델이 없다는 확신 같은 게 생겼어요. 우리가 모델이 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어요. 우리는 흡혈한 경험도 없고, 할 생각도 없고, 하지도 않을 거고, 못하기도 하겠죠. 유럽이나 미국은 그들이 그 어떤 거룩하고 위대한 성과를 이루었거나 앞으로 설령 이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천인공노할 식인(食人)에서 비롯한 성취라는 혐의를 영원히 벗지 못할 것이고요. 우리를 비롯해서 세계 각지에서 제국(帝國)을 위해 헌혈한 나라 중에 우리만큼 체력을 회복한 나라는 사실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쿠바는 부자 부모가 보내주는 학비 받아가며 편안하게 살다가 이제야 학교 공부 끝내고 갓 사회로 나온 젊은이일 뿐이고요. 길은 아마도 우리에게서 비롯될 겁니다. 우리가 지금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세계사인 것이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밍웨이 살던 집 뒷뜰. 왼쪽부터

정여진 한쿠바교류협회 신입 직원

최동근 한국환경농업단체연합회 사무처장

김병인 팔당농부

김수진 농림부 친환경농업 주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