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농업연수

십. 쿠바의 농업

아하 2013. 1. 23. 13:18

 

쿠바 유전생명공학센터 로비에 걸려 있는 체게바라. 사진 속 인물은 김상범 전북 쌀생산자연합회 감사

쿠바 유전생명공학센터 로비에 걸려 있는 체게바라. 사진 속 인물은 김상범 전북 쌀생산자연합회 감사님. 나와 갑장이다.

유전생명공학을 이용한 의약품 개발은 쿠바의 신성장동력이다. 세계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쿠바의 농업

“한국 농업은 쌀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처럼 쿠바 농업은 사탕수수다. 혁명 이듬해인 1960년 9월 30일 쿠바국립은행장 체게바라는 이런 소리를 했다.


“여러분들은 사탕수수가 쿠바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것입니다. 멕시코의 면화, 베네수엘라의 석유, 볼리비아의 주석, 그리고 칠레의 구리, 아르헨티나의 목축과 밀, 그리고 브라질의 커피.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단일 생산을 하는 나라이며 우리 모두는 단일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제국주의자들은 힘을 뻗치기 위해서 우리를 분열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커피, 구리, 석유, 주석, 사탕수수 생산국으로 나눠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멸시킬 더 낮은 가격으로 한정 없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가장 고귀한 재산인 자유와 경제적 윤택, 해결 못 할 어떤 문제도 없다는 자신감을 쟁취하기 위해서.”(장코르미에 지음, 김미선역, 체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2000. 483쪽~485쪽)


그러나 쿠바의 이런 상황은 혁명 이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더 강화된 것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경제 블록 속에서 쿠바의 사탕수수, 설탕은 매우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 국제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5배라고 한다)으로 사탕수수를 내다 팔아서 나라 살림살이를 했다. 사탕수수 생산량이 가장 많았을 때 800만 톤에 달했다고 한다(우리나라 연간 쌀 생산량은 400만 톤 정도이고 쿠바의 사탕수수 생산량은 지금은 거의 반 토막 난 상태라고 한다). 그러니까 설탕 비싸게 팔아서 석유도 사고 먹을 것도 사고 차도 사고 뭐든지 필요한 걸 사다 쓰면 되는 거였다.

 

에헤라 디야! 구아바나 광장. 백승우는 안 보인다. 저 미로같은 구도심을 쏘다니고 있다. 놀라운 건 전혀 슬럼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바나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데, 건물은 쇠락했지만 거리는 안전하고 사람들은 활력이 넘치고 친절하고 편안했다. 거지나 노숙자 하나 없고 이웃들은 마치 우리 동네처럼 드문드문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놀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열린 창과 문으로 들여다 보이는 집안은 깔끔하고 잘 정돈돼 있었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으로 섬유․잡화․식품․화학 산업에서 출발해 전자․자동차․철강․조선․석유화학․정보통신 등 소위 말하는 국가기간산업을 키우느라 쎄가 빠지고 있는 동안, 쿠바 인민들은 사탕수수 농사나 조금 지으면서 신나게 띵까띵까 놀았던 것 같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무상의료․무상교육․무상주택․무상급식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 의․식․주․의료․교육 등을 정부가 거의 완벽하게 책임지는 가운데, 인민들은 적은 시간 일하고 많은 시간 놀았다. 그러니까 일하는 대신 공부하고 운동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마치 든든한 부모를 둔 유학생 같은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도 발 벗고 나서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을 위해서도 자선의 손길을 내밀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쿠바의료진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각국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서른 해 만에, 잔치는 끝났다! 돈 붙여주던 부모님 사업이 망해버린 것이다. 쫄쫄 굶어 가며 먹고 살길 찾느라 십여 년이 흘렀고 일 시작하고 벌이느라 또 십여 년이 흘렀다. 안하던 일 새로 배워 하느라고 고생 꽤나 했지만 이제는 제법 그럴 듯한 직장(관광)도 생겼고, 비전이 보이는 새로운 사업(유전생명공학에 기초한 의약품 생산)도 자리를 잡아 간다. 성공한 친한 친구(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아뿔싸, 기본이 안 돼 있다. 이십 년 생고생하며 앞만 보고 뛰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상전벽해, 갈 길이 구만리다. 교통․정보통신․금융 같은 기본적인 사회경제 시스템을 손도 대지 못 했다.

 

우리 세대로 치자면 대학 다니는 동안 열심히 사회운동 하다가 마지 못 해 직장으로 떠밀려 들어가 쓴맛 단맛 다 보면서 이제야 좀 철도 들고 자리도 잡아가는 삼십대 초반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겠고, 젊은 시절 품었던 꿈과 이상도 절대 포기할 수는 없고, 이 불꽃 튀는 절대 모순 속에서 해법을 찾아 아직 아무도 풀지 못한 숙제를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새 길을 찾아가는 젊음이라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는 바꾸어 얘기하면 세파에 시달리느라 젊은 시절 순수했던 맛도 다 사라졌고, 아직 세상에 완전히 정착한 것도 아니어서 안정감이나 원숙감이 느껴지지 않는, 한 마디로 이도저도 아닌 맹탕이란 소리이기도 하다. 내가 전반적으로 느낀 쿠바는 그랬다. 치열한 맹탕!

 

대한민국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그동안 축적해온 사회적 부(富)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골고루 퍼짐으로써 내수시장을 키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이후 20년 동안 자동차․정보통신․금융․석유화학 산업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성과를 거뒀으며, 그러니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라도 한 쪽으로 쏠려 있는 부의 재편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설(說)이 있는데, 나는 이 설(說)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농가 소득과 도시 가구 소득의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 때, 1980년 중반부터다. 한국이 이러고 있을 때, 쿠바는 어둠 속을 헤매느라 아무 짓도 못 했을 것이다. 20년을 까먹은 것이다.

 

다시 얘기를 농업부문으로 돌리면, 농업은 여타 산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농기구와 농기계 농자재는 외부로부터 들어와야 하고, 생산물은 포장 이동 가공 소비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농업 역시 여타 산업부문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사회경제적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 쿠바의 유기농업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연수기간 내내 우리 일행은 끊임없이 토론하며 여러 쟁점을 도출해 냈다. 쿠바가 준 최고의 선물은 그래서 그들이 이룩한 성과 보다는 오히려 유기농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쿠바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문제의식”을 고취시킨 점이 아닐까 싶다. 정치 사회 경제 체제가 모두 다른 가운데 공통점이라고는 유기농업 하나뿐이기 때문에 유기농업이라고 하는 것을 매우 근본적인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쿠바는 끊임없이 우리를 압박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는 우리의 유기농업을 비추는 거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