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것들이 살아남는 방법
2013. 11.
귀농통문에 기고한 글인데, 글의 성격이 잘 안 맞아서 짤렸어요^^
한 해 농사, 갈무리는 잘들 하셨는지요? 긴긴 겨울에는 무조건 놀겠다는 일념으로 한여름 땡볕과 폭우를 견디며 용감무쌍하게 다섯 해를 살았을 무렵 저는 탈이 났습니다. 오른쪽 다리 대퇴부 속 뼈다귀가 아팠어요. 걷는 것도 불편해서 자꾸 절름거려지고 잘 때도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아파서 잠자는 것도 불편했습니다. 작년 한 해 슬렁슬렁 쉬면서 일하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낫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화천 읍내에 있는 의료원에 가서 뼈 사진 찍고, 강원대병원 의사한테 가지고 가서 보였더니 뼈에는 전혀 문제가 없고, 많이 써먹어서 아픈 거니까 쉬면 낫는다는 겁니다. 삼십년 사십년 농사지어온 형들은 이 소릴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치지만, 이 의사선생님, 명의가 틀림없습니다. 맞았습니다. 올해 농사가 쫄딱 망해서 핀둥핀둥 놀았더니, 나았어요. 채 3분도 안 되는 간단한 진단과 처방이었는데, 자의반 타의반으로 놀았더니 정말 나아버린 겁니다. 이제 안 아파요. 저는 자식도 없고, 아내도 돈을 조금이지만 벌긴 버는 관계로, 비록 땅 사고 집 짓느라 빚을 남부럽지 않게 지긴 했지만, 한 해 정도 농사 망쳐도 그럭저럭 견딜 만은 하니까 동정은 금물입니다.
복슬이가 낳은 새끼 강아지들
다리 아픈 얘길 하자니까 재작년에 죽은 우리 복슬이 생각이 나네요. 복슬이는 제가 춘천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키운 삽살개인데요, 본명은 훌륭한 왕들의 긴 이름을 본 따 지은 “천하태평 배통통 소원성취 복슬복슬 곰돌이”예요. 열 살 되던 해에 심장 발작이 있었어요. 내내 묶여 있다가 바람 쐬러 가자고 데리고 나서니까 좋아서 겅중겅중 뛰다가 고만, 갑자기 몹시 괴로워하면서 캑캑거리다가 혀가 파란 색으로 변하고 온 몸이 굳어지면서 축 늘어지는 녀석을, 삼십 분 넘게 마사지를 하고, 죽염수를 먹이고, 이래저래 애 써서 겨우 한 번은 살려냈어요.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그 후로 절름거리더라고요.
우리 집에 오신 장모님이 다리 저는 개 불쌍타고, 당신 잡숫는 뉴질랜드산 홍합으로 만든 관절염 약이 좋다며, 복슬이는 잘 안 먹으려는 거를, 쌀밥 속에 숨겨 넣어서 주먹밥을 만들어가지고 정성껏 먹이셨어요. 신통하게도 다리가 나았는데요, 나은 다리로 복슬이는 예전처럼 좋아서 펄쩍펄쩍 뛰다가 고만 다시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죽어뻐린 겁니다. 살려고 아픈 거였어요! 농사짓는다고 바빠서 잘 돌봐주지도 못 했는데, 우리 복슬이는 제 목숨 버리면서 저한테 한 수 가르쳐주고 갔습니다.
진딧물은 채소 농사짓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골칫덩어리인데요, 이 녀석이 살아가는 방식은 책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즘처럼 날이 추워지면 알을 낳아요. 겨울을 나야 하니까 알을 낳아 놓는 겁니다. 알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알을 까고 나와서 먹을 게 충분하고 살만하다 싶으면 새끼를 낳기 시작합니다. 새끼가 전부 암놈이예요. 암놈들이 전부 암놈을 낳고, 태어난 암놈들이 또 전부 암놈인 새끼를 낳아요. 제곱으로 막 불어납니다. 하루에도 몇 대(代)가 생산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먹을 게 부족하겠다 싶으면, 이번에는 날개달린 새끼를 낳는대요. 다른 데로 옮겨가야 하니까 날개 달고 나와서 먹이를 찾아 날아갑니다. 옮겨 간 데가 살만하다 싶으면 또 날개 없는 암컷을 낳아제끼는 식이예요. 그러다가 날이 곧 추워질 것 같다 싶으면 수컷도 태어납니다. 암수가 교미를 하는지 어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여튼 어찌어찌해서 이 녀석들이 내년 봄에 부화할 알을 까놓는 거예요. 영화에 나오는 트랜스포머 따위는 짓딧물 발뒤꿈치도 못 쫓아갑니다. 종도 수천종이나 되고 자신을 해하는 약재에도 금세 내성을 갖춰버립니다. 개체 하나하나는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번식 속도가 워낙 빨라서 일단 일정한 숫자를 넘어가면 순식간에 농사꾼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세력이 되어버리고 말아요. 그래서 진딧물은 일단 눈에 띄었다 하면 그 즉시 아작을 내야 해요. 잠시만 방치해도 못 잡습니다. 진딧물에서 유추해 보면 눈에 안 보이는 병원균들, 예컨대 세균이나 곰팡이 따위의 생활사를 짐작은 할 수 있겠지요. 틀림없이 진딧물이 발뒤꿈치도 못 따라갈 만한 번식력과 적응력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농사짓는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풀을 뽑지 않고 밑둥을 낫으로 서너 차례 베어내면, 풀은 줄기 뻗는 걸 포기하고 그냥 마구잡이로 꽃대부터 디밀고 올라와서 씨를 맺어버리잖아요? 온 몸에 가진 모든 양분을 다 쏟아 부어서 씨앗을 영글게 하지요. 풀을 심어 거름이 되게 하려면 그러니까 꼭 씨앗 맺기 전에 갈아엎어야 한다고 합니다. 풀이 제 몸에 지닌 양분을 모조리 씨앗(열매) 맺는데 써버리기 때문에, 일단 씨앗이 영글면 몸통은 아무 영양가 없는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소한테 먹이는 볏짚은 그래서 조사료 중에서 제일 영양가 없는 허풍선이라고 해요. 생명의 알갱이는 사람들이 탈탈 털어서 낼름 잡수니까요.
수십 수백 수천 년을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비행선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해서 새끼를 낳는 우주선은 제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만들기 어려울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새끼를 낳고 새끼는 또 새끼를 낳고 그 새끼는 또 새끼를 낳는 것(기독교 구약성경이 왜 그렇게 많은 부분을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았음에 할애하는지!), 싹이 트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열매는 스스로 다시 씨앗이 되는 것, 그러면서 나뉘고 또 나뉘어 웬만해서는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많은 종류로 퍼져나가는 것, 서로 먹히고 먹는 얼개로 촘촘히 짜 엮이는 것, 이게 소위 순환이니 다양성이니 자기복제니라고 말하는 생명현상의 본질일 텐데요….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족속이 살아남기 위해서, 실제 DNA는 아니지만 마치 DNA와 같이 온 몸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 넣은, 유사DNA가 있는데, 그게 말하자면 농사DNA다.”라는 가설을 한 번 세워봤어요. 왜 맨 날 그런 쓸데없는 짓만 하냐고요? 농사라는 게 단순노동이어서 늘 손발은 바빠도 머리는 심심하니까 재미삼아 그러는 건데요, 재밌잖아요. 하하하….
농사DNA에서 비롯되는 경작본능, 그러니까 땅을 갈고 씨앗 뿌리고 가꾸고 수확해서 맛나게 조물락거려서 낼름 삼키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은 말하자면 실제 본능은 아니지만 거의 본능에 준하는 유사본능이라는 거지요.
사실 이런 생각은 지난겨울 쿠바에 다녀 온 뒤에 하게 됐어요. 먹을 게 부족하다는 사람들이 땅이 탱탱 놀고 있는데 농사지어먹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자기 땅에서 나지도 않는 밀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데다가 정부가 주도하는 올가노포니코라는 것도 억지춘향같고, 참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싶어서 그 나라 역사를 죽 훑어보게 된 거죠. 그랬더니 이 사람들한테는 농사DNA가 아예 생길 틈이 없었던 거예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팔짱을 끼고 “흠…, 그래서 그렇군!”이라며 연구 성과에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려는데, 근데요 웃기는 건, 이게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도 만만치 않아요. 도시화율이 90%에 달했고, 그나마 남아 있는 농사꾼의 절반은 생산연령을 지난 만65세 이상 노인들이고 일년 소비량을 보면 쌀이나 밀이나 큰 차이가 없는데다가, 돈으로 치면 쌀이나 채소에 비해 축산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거든요. 사료는 둘째치고라도 유기질 비료 만들 유기물이 없어서 수입해 쓰는 지경인데, 남의 나라 비웃을 처지가 절대 아니란 걸 금세 자각하고 부끄러워지는 거예요.
그 동안은 농사DNA를 가진 인간 종(種)이 세상을 채워 왔는데, 이제 머지 않아 한반도 남쪽 동네에는 이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 종들은 멸종하지 않을까? 마치, 오랜 동안 이 땅의 논밭을 채워왔던 씨앗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것처럼, 논밭을 가꿔왔던 농사꾼들도 다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그러고서도 우리 족속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쌀 관세화니 한중 FTA니 하는 것들로 쉬지 않고 농사꾼들을 줄여 없애겠다고 다그치는데, 당장 농사꾼들이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야 그렇다고 쳐도, 농사DNA가 거세된 채로 과연 우리 족속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할까? 내가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면,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살아남아서, 우리 종족이 사멸하는지 살아남는지 내 두 눈으로 꼭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어떤 분들은 “이 인간이 울화가 치미는데 어디 풀지도 못 하고 차고 넘치니까 이제는 아예 저주를 퍼붓는구나!”라며 끌끌 혀를 찰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그게 아니고요, 저는 정말 궁금해요. 순수한 궁금증입니다. 만일 우리 후손들이 세세손손 잘 먹고 잘 산다면, 우리는 괜한 잔소리꾼에 걱정꾸러기인 셈이잖아요? 차라리 그편이 낫겠지요?
빛깔 고운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문턱입니다. 겨울 잘 나시고 새봄에 새싹처럼 피어나시길!
백승우
강원도 화천 농부. <유기농을 누가 망치는가?>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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