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토종곡식, 씨앗에 깃든 우리의 미래

아하 2013. 1. 7. 23:58

 

2012년 12월에 출간됐다. 다 쓰기로 약속하고 시작한 책을 마무리짓지 못 했다.

김석기님의 해박한 지식과 발품으로 겨우 완성됐다.

입말로 쓰는 내글은 비교적 잘 읽히고 재밌다. 김석기님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 볼 만하다.

+++염치 불구하고 서문은 내가 썼다.

잡곡이 살아야 농업이 산다


같은 농사꾼이라고 해도 타고난 재능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밭을 갈고 두둑 짓는 일에 더 신명이 나고, 어떤 사람은 씨앗을 뿌리고 김매는 일을 더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줄기를 유인하고 가지를 솎아주는 섬세한 일을 더 잘 하고, 어떤 사람은 수확해서 갈무리하는 일에 빼어나다. 철들면서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오직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전문가들만 우글우글하는 속에, 밝고 따뜻한 눈으로 작물을 살피고 눈에 띄는 도드라진 녀석들을 따로 모아 따로 뿌리기를 반복해서, 먹고 살기도 벅찬 힘겨운 농업노동을 묵묵히 이겨내면서  끈질긴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눈이 휘둥그레지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없었을 리 없다.

 

큰 산 하나만 넘고 강물 하나만 건너도 비바람이 다르고 햇살이 다르고 땅과 흙이 다르니 각 지역마다 잘 되는 씨앗이 따로 있었을 테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고집 세고 긍지 높은 농사꾼들, 아마도 제 맘에 맞는 씨앗도 다 따로 있었을 것이다.

 

맛이 있는가? 수량은 얼마나 나는가? 모양이 예쁜가? 빛깔이 고운가? 가뭄에 잘 견디는가?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는가? 갑작스런 추위에 견디는가? 병은 없는가? 벌레가 꼬이지는 않는가? 저장도 잘 되는가? 두루두루 따져보고, 이웃이 심은 밭을 여러 해 동안 지켜본 뒤에 어렵게 말 꺼내서 조금 얻어온 씨앗, 한꺼번에 왕창 심었을 리도 없다. 조심스럽게 조금 심어보고 씨 받아 늘리면서 확신이 선 뒤에야, 물려받은 씨앗을 그만두고 새로운 씨앗을 심었을 것이다. 이웃이 청하면 또 조금 나누어 주고….

 

이렇게 이 땅에서 오랜 시간 여러 대에 걸쳐서 선별되고 고정된 씨앗을 토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밀의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이지만 ‘앉은뱅이 밀’의 원산지는 한반도가 된다. 우리 땅과 하늘과 비와 바람이 농사꾼의 손을 빌어 선택한 씨앗, 이것이 토종이다.


요즘 잡곡은 식품 가공과 가축 사료에 주로 쓰인다. 부침가루․튀김가루․물엿․간장․고추장․된장․두부․빵․과자․라면․짜장면․짬뽕 등등 온 국민이 즐겨먹는 가공식품의 재료가 옥수수․콩․밀 등이고, 소․돼지․닭에게 먹이는 사료가 모두 잡곡이다. 축산은 이미 우리나라 전체 농업생산의 40%를 넘었다. 우리나라 가공식품의 원재료와 곡물사료의 원료는 모두 수입 잡곡이다. 그래서 식량자급율이 겨우 20%대에 머물고 있다. 우리 농업 문제의 원인과 해법이 바로 여기, 잡곡에 농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얘기한다. 잡곡이 살아야 농업이 산다. 잡곡 농사가 살아야 국민이 건강해진다. 우리 잡곡으로 만든 안전하고 품질 좋고 저렴하며 정성이 듬뿍 담긴 가공식품을 먹을 권리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있다!


토종 잡곡이 살아나고, 농촌으로 사람들이 몰려 내려와, 농가마다 잡곡을 심어 맛난 음식을 빚어내고, 도시 골목마다 시골 농가와 연결된 구멍가게가 즐비해서, 농가와 구멍가게와 시민 밥상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짜여진 음식네트워크를 만들어 내는 맛있는 꿈을 꾼다. 행간에 숨어 있는 이런 꿈을 책 읽는 분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는데, 걱정이다. 사람들이 “꿈, 깨!”라고 할 것 같다.

 

농사꾼 백승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