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귀농 歸農의 원조

아하 2015. 11. 3. 11:36


백석(1912~1995) 이 양반이 벌써 귀농이란 시글 써 놓으셨다.

시를 쓴 해가 나와 있지 않지만 젊었을 때 썼을 테니 지금부터 거의 팔구십년 전이다.

시 전문이다.


귀농 歸農


백구둔白狗屯의 눈 녹이는 밭 가운데 땅 풀리는 밭 가운데

촌부자 노왕老王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버들의 버들개지 피여나는 데서

볕은 징글징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임자 노왕老王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


노왕老王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을거리고

고방엔 그득히 감자에 콩곡석도 들여 쌓이고

노왕老王은 채매도 힘이 들고 하루종일 백령조白鈴鳥 소리나 들으려고

밭을 오늘 나한테 주는 것이고

나는 이젠 귀치 않은 측량測量도 문서文書도 싫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 싶어서

아전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노왕老王한테 얻는 것이다


날은 챙챙 좋기도 좋은데

눈도 녹으며 술렁거리고 버들도 잎트며 수선거리고

저 한쪽 마을에는 마돝에 닭, 개, 즘생도 들떠들고

또 아이어른 행길에 뜨락에 사람도 웅성웅성 흥성거려

나는 가슴이 이 무슨 흥에 벅차오며

이 봄에는 이 밭에 감자 강냉이 수박에 오이며 당콩에 마늘과 파도 심으리라 생각한다


수박이 열면 수박을 먹으며 팔며

감자가 앉으면 감자를 먹으며 팔며

까막까치나 두더지 돝벌기가 와서 먹으면 먹는 대로 두어 두고

아, 노왕老王, 나는 이렇게 생각하노라

나는 노왕老王을 보고 웃어 말한다


이리하여 노왕老王은 밭을 주어 마음이 한가하고

나는 밭을 얻어 마음이 편안하고

디퍽디퍽 눈을 밟으며 터벅터벅 흙도 덮으며

사물사물 햇볕은 목덜미에 간지로워서

노왕老王은 팔장을 끼고 이랑을 걸어

나는 뒷짐을 지고 고랑을 걸어

밭을 나와 밭둑을 돌아 도랑을 건너 행길을 돌아

지붕에 바람벽에 울파주에 볕살 쇠리쇠리한 마을 가리키며

노왕老王은 나귀를 타고 앞에 가고

나는 노새를 타고 뒤에 따르고

마을끝 충왕묘蟲王廟에 충왕蟲王을 찾아뵈러 가는 길이다

토신묘土神廟에 토신土神도 찾아뵈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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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둔 : 만주지역 마을 이름

노왕 : 라오왕. 왕씨. '노'는 중국어에서 사람의 성씨 앞에 붙여 친밀감을 나타내는 말

밭최뚝 : 밭두둑

석상디기 : 석섬지기

채매 : 채마밭. 채소밭.

백령조 : 몽고종다리

아전 : 지방관청의 속료. 서리. 소리. 하리.

마돝 : 말과 돼지

돝벌기 : 돼지벌레. 잎벌레. 해충

이랑 : 두둑과 고랑을 함께 이르는 말

고랑 : 두둑과 두둑 사이의 낮은 곳

울파주 : 대, 수수깡, 갈대, 사리 등을 엮어 세워 놓은 울타리

토신묘 : 흙을 맡아 다스린다는 토신을 모신 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