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겨울이 길어서 좋아라

아하 2012. 5. 29. 22:49

[2006년 11월 전원생활에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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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내려오던 첫해 가을에 젖 떼자마자 데려다 키운 <천하태평 배통통 소원성취 복슬복슬 곰돌이>라는 로마황제처럼 긴 이름을 가진 우리 복슬이.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이 녀석을 어쩌나’ 싶어 시골을 뜨지 못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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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길어서 좋아라!


이사하면서 원래 살던 형님께 여쭤봤습니다.

“겨울에 기름은 얼마나 들어요?”
“두 드럼 가지면 될 거다.”
“두 드럼요? 얼마 안 드네요.”

이렇게 해서 저는 춘천에 사는 4년 동안 겨울에 실내온도 5도로 겨울을 나게 됩니다. 한 달에 두 드럼쯤 든다는 얘기를, 겨우내 두 드럼 드는 걸로 알아들은 거지요.

강원도의 겨울은 춥고 깁니다. 상강 전에 서리가 내리고, 입동 전에 얼기 시작해서 이듬해 춘분쯤 되어야 언 땅이 녹으니, 다섯 달은 겨울입니다. 춘천은 특히 분지라서 일교차도 크고 춥기도 무지막지하게 춥습니다.

제가 살던 고성리는 춘천호에서 직선거리로 1키로미터 남짓 될 텐데요, 겨울이면 강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쩡쩡거리지요. 저녁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면서 얼어 있는 강이 더 얼어붙는 소립니다. 강을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 있는데, 이런 마을에는 도둑이 없었다고 해요. 도둑이 강을 건너다가 쩡쩡거리는 소리에, 얼음이 깨지는 줄 알고 줄행랑을 놓았다고 합니다.

전라남도 화순에 살 때도 그렇고 춘천에 살 때도 그렇고, 제가 살던 집은 1953년경에 지은 집입니다. 귀농하겠다고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건데요, 지금 시골에 있는 옛날 집은 53년에 지어진 게 많습니다. 전쟁 끝나고 피난 갔다 돌아와서 급하게 지은 거지요.

화순에서는 아궁이에 불 때는 옛날 집 그대로였고, 고성리에서는 먼저 살던 형님이 10년 남짓 사시면서 많이 손을 봐 놓으셨어요. 주방과 거실, 안방은 기름보일러를 놓았고, 작은방 하나는 아궁이에 불을 땠습니다. 아무리 손을 봤더라도 기본 뼈대는 옛날 집입니다. 그 허술한 집에서 다섯 달이나 되는 길고 추운 겨울을 기름 두 드럼 가지고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집 안에서도 효도 선물용 두꺼운 내복을 입고, 두툼한 겉옷을 입고, 솜바지 입고, 솜 점퍼 입고, 허연 입김 내뿜으면서 “어 ~ 춥다”를 연발했지요. 저는 고향이 전라북도 옥구고 집사람은 부산입니다. 그러니 그 추위가 오죽했겠어요.

왜 이렇게 미련하게 살았을까요? 물론 돈도 없었고요, 아직 젊었기 때문일 것이기도 한데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애초에 시골로 올 때, 적게 벌고, 적게 쓰겠다고 작정한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지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이렇게 마구 쓰는 건 옳지 않다고 봤지요. 웬만한 건 자급자족하면서 최소한의 자원을 가지고 살아보리라 생각한 겁니다. 이게 시골로 내려올 때 제가 세운 첫 번째 원칙이었어요. 그럴듯한 말로 “자발적 가난”이라고 합니다.

같은 말을 노자(老子)는 “치인사천(治人事天)에 막약색(莫若嗇)이라”고 했지요. 치(治)는 다스릴 치로 새기는데, 다스리다라는 말은 다 쓰이다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말로 풀어보면 “사람을 두루 쓰이게 하고 하늘을 섬김에 있어 아낌보다 나은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물건이 남아돌아서 “아낌”이 없어지니까 사람이 쓰이질 못 해 실업난이 생기는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합니다.

농부를 특별히, 아끼는 사람이라고 해서, 인색할 색자를 써서 색부(嗇夫)라고도 했다고 해요. 그러니 농사꾼으로서 마땅히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정도껏 해야 한다고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요, 도시에 살 때 매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감기에 걸리던 집사람이 시골로 와서는 아직까지는 감기 없이 겨울을 나고 있다는 겁니다.  

겨울이 춥고 길어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점도 있어요. 저한테 집과 땅을 빌려주신 형님은 귀농하려면 무조건 강원도로 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겨울엔 무조건 놀 수 있거든.”
“오호!”

사실, 이 말에 혹해가지고 앞뒤 안 가리고 그냥 내려온 겁니다. 일 년 열두 달 중에 다섯 달 동안은 너무 추워서 하우스 농사도 할 수 없고, 모두가 놀으니, 나도 따라 놀아야 한다는 것인데요, 이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정작 고성리에 사는 4년 동안 정말 한가하고 여유롭게 겨울을 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농사로 벌이가 안 되니 겨울에도 이일 저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춘천에 생활협동조합 만드는 일을 하느라 꼬박 한 겨울을 매달렸고, 시내에 있는 학원 강사로 두 해를 일했고, 공부한다고 서울을 오가며 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틈틈이 번역도 하고, 책도 쓰고, 목수일도 하고, 조각 글도 쓰면서 정말이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게 근근이 “버텼다”고 봐야겠지요. 4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살려고 시골 내려온 건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요.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자고, 농사철에 열심히 농사짓고, 겨울 되면 겨울잠 자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누가 뭐라든 그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고 싶었던 건데 말이죠, 이건 농사꾼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장 있는 회사원도 아니고, 어정쩡해가지고 몸만 고달프고 벌이는 시원찮고!
다부지게 농사를 짓던지, 다시 서울로 올라가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릴 시점이 되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