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우리마을 현대사) 어디 살아요?

아하 2015. 11. 6. 08:27



어디 살아요?

 

당신 돈 가져왔어?”

아니.”

어쩌나, 나도 돈을 한 푼도 안 가져왔는데

지난 겨울에 읍내로 목욕하러 나갔는데 깜빡 잊고 둘 다 돈을 안 챙겨나간 겁니다.

읍에는 누구 아는 사람 없어?”

이 시간에는 없지.”

여섯 시 이전이었으면 관공서에 근무하는 형님들 찾아서 꾸면 되는데, 해 지고 나니까 깜깜하게 되었죠.

그냥 가서 얘기해 보자.”

목욕탕에 갔습니다.

용호리에서 왔는데 깜빡 잊고 돈을 안 가지고 나왔어요.”

아저씨가 웃으면서 얘기하십니다.

용호리 살아요?”

.”

용호리 어디 살아요?”

 산호교회 아시죠?”

 알지. 내가 용호리는 잘 알지.”

길손식당도 아시겠네.”

조씨네?”

. 정말 잘 아시네. 조씨 아저씨는 재작년에 장촌리로 이사 가셨어요.

그래?”

. 집도 새로 근사하게 짓고 잘 사신대요.”

그 양반 고생 많이 했는데, 잘 됐네.”

길손식당 끼고 돌아가면 노인회장님댁 있잖아요.”

그렇지.”

그 바로 옆집이예요. , , 돌아가신 철수형(예명입니다)네 집요. 그 집 얻어서 살아요.”

철수?”

, 철구아저씨(예명)라고 해야 아실려나?”

, 철구. 알지. 알어. 맞다. 철구 동생이 철수지. 맞어, 맞어. 그 집에 살아?”

.”

집사람은 먼저 목욕탕으로 들여보내고 저는 아저씨랑 한참을 얘기 합니다. 용호리엔 왜 왔느냐부터 시작해서 오기 전에는 뭐를 했는지, 와서는 뭘 하고 사는지 아저씨가 궁금한 건 다 말씀을 드리고, 저도 또 이 어저씨가 용호리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 궁금한 거 다 여쭤봅니다. 그러다 보면 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월남파병부대가 있던 시절로도 가고 그렇습니다.

제가 주워들어서 알고 있던 대략의 마을 역사에 이 아저씨의 얘기 녹아들면서 아주 재미가 납니다. 머리 깎다가 미용사 아주머니랑 얘길 나눠도 그렇고 물건 사다가 물건 파는 아주머니랑 얘길 나눠도 그렇고 누구나 용호리를 잘 알고 용호리와 아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서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동네 살고 있는 형님들 어린 시절이나 그 아버지 세대 얘기를 주워듣기도 하고, 이 집과 저 집 사이에 얽힌, 동네 안에서는 듣기 어려운 사연을 듣기도 합니다. 때로는 얘기가 엇갈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치하기도 하고요. 참 재미있습니다.

때로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걸 발견하기도 합니다. 지도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우리 동네는 파로호와 용화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파로호는 깰 파(), 오랑캐로()를 쓰는데, 625전쟁 때 중공군을 크게 무찔러 이겼다고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새로 지은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대붕호입니다. 대붕(大鵬)장자에 나오는 커다란 새예요. 지도에 그려진 호수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새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옛 어른들이 허투루 이름을 지었을 리 없지요.

붕은 한 번 날개짓으로 구만리 장천을 날아간다는 전설의 새입니다. 그래서 구만리(九萬理)가 있습니다. 호수 들머리에 화천읍에서 용호리로 오다보면 첫 마을이 구만리예요. 아싸~. 여기까지는 잘 맞아 떨어집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면, 이 커다란 새는 날아서, 구만리를 날아서 어디로 갈까요?

저게 성불령(成佛嶺)이다.”

친구가 와서 그래요. 우리나라 산 이름과 산 높이를 줄줄 꿰고, 산과 강을 맥을 따라 그리다 보면 어느덧 우리나라 지도가 되는, 지리에 해박한 친구가 와서 알려준 겁니다. 퍼즐조각이 맞춰졌어요.

아하! [대붕호-구만리-성불령-용화산] 대붕이 구만리 장천을 날아서 성불하여 용화정토세계로 가는 거구나! 용화정토세계는 불교에서 상정한 이상세계, 이상향입니다.

어때요? 멋지죠? 시간이 되면 화천문화예술원에 가서 혹시라도 제 추리가 맞다는 걸 입증할 만한 어떤 근거 같은 게 있는지 찾아보고 싶어요.

우리 조상님들은 이 동네에, 이 지형지세에 이렇게 멋진 이름을 붙여주셨는데, 매우 역설적이게도 이 동네의 현대사는 참으로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육이오전쟁 당시에 중공군 일개 사단이 전멸할 정도의 치열한 전투로 호수가 피로 물들었고, 월남으로 날아가 이슬로 스러져간 젊음이 마지막으로 밟았던 고국땅도 여기였습니다. 광주로 갔던 특전사도 여기서 주둔하며 훈련했었고 이 지역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삼청교육대도 있었고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해발 600미터 배티재 길 내느라 유신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기도 했어요.

좋은 얘기 같으면 세세하게 하나하나 아껴가며 죽 늘어놓을 텐데요, 아픈 역사라 두루뭉수리하게 얼른 대충 뚝딱 해치우고 지나갑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어디 사는지 알면, 하늘에서 툭 떨어진 존재가 아니고 아래로 깊이깊이 내려진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 같은 뿌리에서 나와 옆으로 뻗어나간 수많은 가지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렇게 우리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런 걸 좀 명확히 알고 살면, 그래도 한 세상 살아 내는 게 좀 수월치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2008. 8.)